소설을 읽으면서 내 취향을 더듬어보는 일,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세상의 모든 소설을 할 수만 있다면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보다 더 컸던 시절도 있었다. 일을 그만둔 뒤로는 좋아하는 소설가의 글만 읽겠다고, 그렇지만 새로 나오는 소설가들의 작품은 꾸준히 찾아 읽겠노라고, 그래야 또 좋아하는 소설가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어수선한 태도로 읽고는 있는데. 그리고 이 작품을 탐색을 하는 과정에서 만났다.
책을 소개하는 내용들이 꽤나 화려하다. 이 정도의 권유라면 읽기 전 마음이 설렐 수밖에 없다. 나에게로 와서 머물러 주기를, 기대하면서 바라면서 읽어 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부터 취향이라는 말을 자꾸 떠올리는 나를 본다. 이건 별로 반갑지 않은 조짐이다. 내 읽기가 왜 앞서 읽은 이들과 다른 건가 하는 문제까지 풀어야 한다는 것이니까. 어디서 어떻게 다른가, 어디가 어떻게 걸리는가, 내 취향은 어떤 성질로 인하여 이 작품에 온전히 닿지 못하는가.
이기동이라는 인물의 일대기, 그리고 존 케이지가 4분 33초 동안 무음으로 연주했다는 사건, 둘의 교차 서술, 작가의 의도, 작가의 희망,...... 어떤 것에도 확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그랬구나, 어렵고 힘들고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고, 세상의 누구나 이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는 있겠는데, 난 좀더 특별한 게 있었으면 싶어 아쉬웠던 것이다. 이대로 끝이라고? 나도 모를 답을 작가에게 기대한다는 게 퍽 터무니없는 소리란 걸 알지만, 알면서도 섭섭한 느낌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음악의 문제일 수도. 내가 음악을 전혀 모른다는 것, 존 케이지의 연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것, 그래서 글의 절반을 날려 버린 셈일 수도 있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도 이런 경우에 해당되겠지. 그래도, 그래도, 끝내 투정처럼 부려보고 싶은 말, 어차피 상상이라면 존 케이지의 에피소드들이 존 케이지를 전혀 모르는 이들까지 끌어들일 수 있을 만큼 매력을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싶은...... 아마도 여기가 경계였겠지. 이 소설을 취향으로 받아들이는 독자와 나처럼 거리감을 느끼고 마는 독자 사이에 놓이는. 그러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테고. (y에서 옮김2022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