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의 우리나라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는 이 사실,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인연이다. 다른 곳도 아닌, 다른 때도 아닌 딱 지금 이곳에 있는 나. 지상에 천국은 원래 없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위해 우리는 이모저모 애를 쓸 수 있을 뿐인데, 지금 이 시기에 여기 있다는 게 나로서는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지. 나는 정녕 세상의 다른 어딘가에 가 있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의 흐름과 평행선을 달리면서 한 생각이다. 소설 속 인물들의 처지와 고난과 사랑과 순간의 행복들이 편한 곳에서 글이나 읽고 있는 내 처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서 안타까워하고 절망도 했다가 곧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가 했다. 나는 이대로 요만큼 안전하구나.
소설의 시작은 우아했다. 고전음악이라니, 서양의 교회 음악이라니, 클라비코드라는 악기까지. 내가 모르는 18세기 후반 서양의 궁정음악 세계 안으로 불쑥 들어선 기분에 내내 당황스러웠다. 이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어렵게 여겨지는데 알아들을 수 있기는 할까? 이 작가의 글이 어려웠던가? 안 그랬던 것 같은데? 한동안 이 작가의 글을 놓치고 있었구나,... 소설 밖 어지러운 잡생각이 읽기를 계속 방해하기는 했는데.
재미있었다. 점점 빠져들었다. 현재 시점의 주인공 하나코와 김상호, 18세기 후반의 주인공 아이블링거와 힌트마이어. 이야기는 교차된다. 정신을 차려야 앞에 읽은 내용을 기억한 채로 이어 읽을 수 있다. 얼마 만인가? 내 의식을 붙잡고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낀 것이. 그래, 이런 힘을 보여 준 작가였지. 다시 관심을 세운다, 이 작가의 글을 찾아본다, 안 읽은 책이 많이 있구나, 내가 놀았구나, 나는 다시 바빠지고 즐거워지고 행복해지겠구나... 음악과 관련된 용어가 나올 때마다 헤매었지만 머뭇거리지 않고 나아갔다. 나는 음악이 아니라 소설의 길로 가고 있었으니.
낱낱의 삶은 개별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네 삶은 모조리 이어져 있다. 운명도 행복도 슬픔도 원한도 모두 다. 지금 당대가 다 맡지 못한다면 대를 이어서라도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라도. 이것이 역사인가 보다. 이름을 널리 남기지 못한다고 해도 살아서 맡은 사명이라는 게 바로 삶의 이 흔적이 아닌지. 살다가 갔다는 것. 너도 나도 우리 모두는. 훗날 찾아주는 이가 있어도 또 없다고 해도. 애틋하지 않은 생명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환멸은 남는다.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안 해야 하는 것을. 그때나 지금이나 그곳이나 이곳에서나 저지르는 이들은 저지른다. 저지르고 비난을 받고 결국 죽는다. 이게 그들의 사명일까? 마치 악마가 있어야 천사의 존재가 대접을 받는 것처럼? 아니면 불안전한 인간 존재의 한계일까? 불량품 같은? 영원히 나아질 수 없는? 나는 어느 정도로 불안전한 사람일까? 어떤 잘못을 얼마나 저질러 왔을까? 나로 인해 불행했을 사람은 얼마나 있었을까?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물음은 끝이 없이 떠오른다.
시간은 흘렀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지? 나의 짧은 인생에 긴 예술의 은혜만을 기다리며 산다. 남은 날들에는 조금씩이라도 덜 나쁘게 살아야 할 텐데. 이 작가가 도와줄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