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그 개인 혹은 그 문화 속 사람들의 삶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먹을 거리라는 게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문득 결정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동물성이든 식물성이든 먹고 괜찮다는 혹은 몸에 더 좋다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 때로 누군가에게는 생명을 걸어야 할 실험이기도 했을 테니까.
이 책은 유럽을 배경으로 음식과 역사와 문화를 서로 연결지어 살펴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책의 가치에 대해 뭐라고 말할 입장은 못되고, 개인적으로 내게는 읽는 재미가 덜했다. 좀 지루했고, 연결시키기에도 귀찮았고, 읽다 보니 그래서 그랬나 보군, 그 이상의 반응이 생기지 않았던 탓이다. 아마 나는 이런 학술적인 내용보다 가볍고 일상적인 에피소드들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 자료로서의 정보는 넉넉하게 보인다. 배경지식으로 활용하기에 큰 도움이 될 듯하다. 어떻게 이런 자료를 다 거두었을까 그런 단순한 의문도 생겼고(물론 또 다른 책을 찾아보고 알아냈겠지만), 이렇게 정리를 해 놓았으니 다음 연구자는 수월하겠군 그런 참견하는 마음도 들고, 내가 먹는 것이 내 삶의 총체적인 문화로구나, 그렇다면 나는 참 빈한한 사람이구나 자각이 되고.
책에는 저자가 맛시모 몬타나리로 나와 있고 주경철 교수가 옮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도 내가 착각했던 정보 중의 하나였나 보다. (y에서 옮김20130718)
자연의 사용은 문화적인 현상이며, 자연과 문화 사이의 대조는 실제의 대립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선택의 산물이다.- P66
물고기의 소비는 일련의 문화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이것이 진짜 ‘인기 있는’ 음식이 되지는 못했다. 보존 처리된 생선은 가난을 의미했다. 신선한 생선은 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되, 원래 생선은 배를 채워주지 못하는 음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탐나는 부의 이미지는 못되었다. 생선은 부활절에 먹는 ‘가벼운’ 음식으로서, 일상적인 굶주림에 직면하지 않는 사람들만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음식이었다.- P132
풍요와 결핍의 대조는 생리적인 사실일 뿐 아니라 심리적인 사실이기도 하며, 또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에 적응하면서 역사적으로 변화해왔다. 스스로에 대해 즐겁게 만족하는 행복한 빈곤 내지 검소함의 이미지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일부 특권 계급 사람들에 한정된다. 사실 적게 먹는 것이 좋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이 먹는 사람(적어도 많이 먹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P154
서민들의 음식이 갈수록 집단화되고 더 단일화되는 방향으로 ‘단순화’ 되었다는 것은 과거에 비해 실질적으로 빈곤화되었음을 뜻한다. 우리는 이미 옥수수에 기반한 단일 음식 섭취가 일으킨 장기적인 영양결핍과 극적인 질병 상태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또 아일랜드에서처럼 감자 단일경작이 일으키는 엄청난 비극도 보았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라고 해도 전체적으로 서민들의 식사 수준이 떨어지고 빈곤해졌다.- P228
음식의 과잉이 항구적이고 사회적으로 널리 퍼진 현상이 되었을 때 그것은 지금껏 기근의 공포가 드리워져 있던 문화에 대해 새롭고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기근의 공포는 여전히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비록 결핍과 낭비, 조심스러운 절약과 거친 탐닉 사이의 전통적인 정신분열은 새로운 상황과 분명히 안 맞아떨어지긴 하지만 말이다. 풍요가 일상적인 실제 상황이 되어 있는 오늘날, 과잉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은 수천년의 기근이 각인되어 있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충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P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