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사는 이유
룰루랄라 2020/06/0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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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이유 _ 오스기니스
작년에 북클럽에서 회의하는 용기를 읽고 1년만에 오스기니스 책을 다시 손에 잡았다. 개인적으로 오스기니스의 책은 친절하진 않은데, 항상 읽으면서 저자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번역이 잘못되서 그런건가 싶었는데 같은 저자 책을 3권째 읽다보니 원래 글을 쓰는 방식이 이렇구나 이제는 이해하고 알아서 논지 전개를 정리하면서 읽게 된다.
처음 접한 책은 ‘회의하는 용기’ 였고 그 책에서는 회의를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흔들리는 두 마음으로 정의하고 회의를 9가지로 분류 한다. 그 다음 ‘소명’에서는 소명이란 우리의 직업이 선교사,목사가 되는 것이라기 보다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것이다. 곧 소명(call)이란 하나님(caller)과 친밀한 관계로 초대하는 것이며, 그렇게 부름 받은 나의 소명은 하나님을 위해서 생각하고, 발언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에서 행위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오늘을 사는 이유’에서는 현대시대에 중요해진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시간의 3가지 주요 개념인 1)순환적 시간관, 2)언약적 시간관, 3)연대기적 시간관을 서술하며 시작한다.
첫번째 순환적 시간관은 아브라함계열 종교를 제외한 동양및 서양 전반에서 받아들인 관점이다.
순환적 시간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감각 가능한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었기에 상당히 보편적인 시간관이다. 시간은 순환하며 우리 인생 역시 연속적인 환생을 경험하게 된다. 순환론적 시간관에서 인생은 바퀴에 매인 삶이며 인간이 참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 세계,순환하는 역사안에서 초월하는 수 밖에는 없다. 세계와 역사가 환상에 불과하기에, 역사 속에서 우리가 취하는 행동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흰두교는 요가를 불교에서는 마음챙김,명상 등을 구원의 길로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 언약적 시간관은 성경적 시간관이다. 이는 매우 독특한 시간관으로 시스템 내부에서 그 시스템을 이해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유일한 입장이다. 순환론적 시간관과 대조적으로, 이 관점이 성찰이 아닌 계시의 결과라고 주장한다.그러므로 이 진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들 역시 자유롭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인생, 즉 시간과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중요성이라는 한 쌍의 진리 아래, 시간과 역사는 어디론가 가고 있고, 우리 각자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과 세대, 나아가 전체 역사 안에서 담당할 독특하고 중요한 역할이 있다.
동양 종교들이 자유라고 여기며 옹호하는 “역사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성경의 관점에서는 자유와 책임은 곧 역사에의 참여와 인생이 세상에서 자유와 정의와 샬롬을 위해 일하겠다는 신념이 된다. 언약적 시간관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위해 하나님과 손잡는 협력자가 되어, 시간을 직선적일 뿐 아니라 언약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언약적이기에 우리에게는 시간과 역사 속에 살며 행동 할,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할 자유와 책임이 있다.
세번째 연대기적 시간관은 직선적이고 언약적인 시간이되 하나님,초월성,영원성,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잘라 낸채 세속화된 시간이다. 중요한 차이점은 언약적 시간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보고 그렇게 될 것을 아시는 것인 데 비해, 후자에서 의미는 인간들이 보고 세유려 애쓰는 것이다. 이 차이점은 연대기적이면서 직선적인 시간의 지지자들을 낙관론과 비관론 두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연대기적 시간관은 중요한 의미나 연속성 없이 그저 순간들만 끊임 없이 흐르는 시간들로 채워진 인생관을 만들어 버리기에 인간의 정체성이 뿔뿔이 흩어져 버리기 쉽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인간 존재를 가볍게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다. (쿤데라에 의하면 일회성은 가벼움, 영원성은 무거움이기 때문이다.-반대개념으로 인생을 너무 무겁게만드는 니체의 ‘영원회기’가 있다.)
상기 3가지 관점을 설명한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각 시간관을 대조시켜 성경적 시간관의 장점을 부각시켰다 생각한다.즉 언약적시간관의 특징인 역사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기위해 위 세가지 시간관을 대조 시켰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공리주의에 대해서 읽었을때 벤담의 공리주의와 존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의 차이점(고급욕구와 저급욕구 분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느끼고 감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차이점은 차이를 만든다. 첫째를 선택해서 역사와 인생에 의미가 없어서 세상을 초월할 것을 선택하느냐 셋째를 선택해서 인생의 가벼움안에서 자신을 어딘가 정초시키지 못한채 정체성을 일어갈 것인지, 니체처럼 과도한 존재의 무거움을 얻을 것인지 중 선택하라면 나는 당연히 대부분 언약적시간관을 선택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 저자는 현대식 시계 시간관의 압박과 독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개그우먼 장도연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라는 말을 유행시킨 것처럼 현대 사회는 과도한 효율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압박은 우리에게 시간은 돈이라는 인식을 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일상 언어에 뿌리박힌 표현들이 우리의 시간관을 형성하고, 따라서 은연중에 시간 자체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지시하고 주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대인들은 ‘카르페디엠’- 오늘을 붙잡는 것을 대부분 이기적이고 단기적이고 순전히 즉흥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기니스는 성경적 또는 언약적 시간관에서 ‘카르페디엠’은 더 확실한 토대와 더 강한 추진력, 더 높은 비전이 있다 주장한다. 언약적 시간관에서 ‘과거-현재-미래’는 통전적이다. 회개와 용서는 과거의 견지에서 시간을 구속하는 일의 열쇠이고, 안식일 및 안식 기간은 현재의 견지에서 시간을 구속하는 일의 열쇠다. 즉 성경적 시간관을 사는 우리에게 오늘의 선택은 과거와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의미 있는 선택임으로 오늘을 붙잡는 것,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 삶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오스기니스는 그리스도인에게 언약적 시간관, 오늘을 붙잡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서술하며 이와 다른 시간관이 주도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시대를 역행하는 ‘선지자적 반시대성’ 가질 것을 권면한다.
마지막으로 오스기니스는 자신의 가족사를 서술한다. 19세기 말 청나라 의료 선교사로 중국을 섬기는 것을 특권이라 여기며 감사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료 선교사이자 순교자인 할아버지 묘가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파헤쳐지는 일도 겪었고, 2차세계대전 때 부모님이 중국에 고립되어 일본군과 공산군과 국민군에 둘러싸이는 상황도 겪고 심각한 기근과 장제스의 무자비한 정책속에서 두 형제를 잃는 고통도 겪었다 그러나 오스기니스 가정은 고난 속에서도 항상 감사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에 중국에 공산당이 집권하고 부모님이 중국에서 쫃겨났을 때도 중국을 향한 선교의 꿈을 접지 않았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했던 오스기니스 가정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며 위로와 격려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신 성령께 감사하다.
회의하는 용기 마지막 장 주님 언제까지 입니까? 에서 처럼 우리에겐 가끔 이유를 알 수 없는 극심한 신앙의 시험이 찾아 올때가 있고 그럴 때 우리는 기다림이란 회의의 문제와 부닥치게 된다. 여기서 오스기니스는 이야기 한다. 인간의 근시안 적인 시각과 생각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라고 기독교 역사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정통이 결국 승리 할 것을 알 수 있었겠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그렇다 사실 기독교 역사 안에서 지금의 정통은 그 시대상황에서 항상 우세했었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였다. 참 교회와 신자는 거의 항상 어두움속에서 빛을 바라봐야 했었다. 오스기니스는 끝은 끝이 아님을 역설하며 우리에게 성어거스틴의 ‘하나님의도성’을 인용한다. “인간의 도성은 항상 줄줄이 무너지겠지만 하나님의 도성은 영원하다.” 이 고백을 자신의 가정사와 기독교사, 신국론을 통해 우리에게 소망과 희망을 이야기 하며 책을 마무리 하게된다.
‘오늘을 사는이유’ 요약및 서평을 마무리하며 간단한 소감은 역시 오스기니스 였다. 항상 그가 제시하는 통찰과 위로는 나에게 큰 방향성이 된다. 꽤 오래 동안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고, 오늘날의 어둠속에 압도되어 지식적으로 빛을 바라봐야함을 알고 있음에도 어둠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보며 안타까워 하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고 빛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그의 책을 통해 얻게 되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적용하여 ‘오늘을 붙잡는지’ ,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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