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체리스가 육두정을 상대로 가망 없는 전투를 벌여도 상관없었습니다. 그저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를, 그 가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죽고 싶었습니다."
* 마지막 순간, 이스트라데즈는 자폭까지는 조금 지나쳤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도 멜로드라마가 켈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온 육두정에 알리고 죽을 수 있으니 나쁘지는 않았다. 세계가 열기와 잡음 속으로 녹아들 때까지, 그의 멍한 눈은 자기 손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 체리스는 므웬의 문화와 역법이 육두정에 탄압받지 않았더라면 그녀에게 어떤 이름이 붙었을지를 생각해보았다. 수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 쌍의 백조로 무너져 내린 키루에브의 아버지. 처형된 부모님과 학살당한 동족들. 폭동이 일어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사상자. 수백 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서비터들. 등롱꾼 아이들을 향한 발포 명령. 산개하는 바늘 요새에서 시체 폭탄에 목숨을 잃은 자신의 함대. 이것조차도 그녀가 두 번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육두정이 저지른 온갖 죄악에 비하면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육두정의 국민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선택을 포기하지 않았다.
> 두 번째 이야기인 '까마귀의 책략'에서는 육두정부에서 보낸 폭탄으로 전 함대를 잃고 가까스로 살아난 '제다오'가 '켈' 분파의 함대를 탈취하며 시작한다. '켈'은 정신 개조 수술을 통해 세뇌 기술을 주입 받아 상관의 명령을 따를 때 마음의 평온을 얻는 군사 작전 특화 분파로, 상관으로 인식한 자의 명령이라면 수년을 함께한 전우에게도 망설임 없이 총구를 겨눌 수 있는 이들이다.
'제다오'는 그저 충성스러운 총으로 쓰이기만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자 하고, 나아가 우주 제국 전체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자 한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 수학자라고는 해도 며칠 골방에 틀어박힌 걸로 우주 전체에 적용될 새로운 역법을 만들어낸다는 게 의아하기는 했지만 마지막 편에서 또 다른 이야기들이 전개될 것 같다.
폐허가 된 함선 속에서 인공 기계인 '서비터'의 도움을 받아 살아 나온다는 전편의 결말부도 좋았는데, 새로운 세계의 포문을 여는 '역법 변동' 또한 서비터들과 협력해 일으킨다는 설정도 인상 깊었다. 대부분은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존재들과 꾸준하게 소통하고, 그들에게 진심을 담아 부탁할 줄도 알았던 주인공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신체를 여성형, 남성형, 양성형으로 개조하는 것이 가능하며 가족 관계 또한 굉장히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어머니만 여럿이기도, 아버지만 여럿이기도, 둘 다 여럿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인지 성적 지향 역시 어느 쪽이든 자연스럽게 표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