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꼬부우기
  • 나인폭스 갬빗
  • 이윤하
  • 15,300원 (10%850)
  • 2019-07-31
  • : 1,017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병사들의 몸뚱이에서 쥐어짜낸 온갖 종류의 붉은색 물감을 한데 모아 써 내려진 신성 모독의 금서가 한쪽 지평선에서부터 반대쪽 지평선까지 전장을 가득 메우며 펼쳐져 있었다.


* 하지만 온갖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생동하는 문화들끼리 서로 맞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잡음 앞에서, 깔끔하게 정리되어 나열된 기록들이 얼마나 부질없어지는지 체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켈 사령부에서 정리한 까마귀 향연의 도시 기록 정보를 열람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보로 기록된 모습을 목격했다. 각각의 정보는 물론 전부 사실이었지만, 그 기록 목록은 까마귀 떼가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날아오를 때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피어오른 흙먼지가 그려내는 신비로운 궤적이 어떤 인상을 주는지 전혀 담아내지 못했다.


* 체리스는 결투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발을 돌려 선실로 향했다. 자리에 눕기 전에 이렇게 물었다. "내가 잠들면 외로운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잠들기 전 작은 전등 하나를 켜놓았다.


* "이게 내 마지막 도박이 되겠군." 제다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자네에게는 가능한 모든 것을 가르쳤네. 내 실수를 반복하지 말게나. 잘 있게, 사령관. 그리고... 불을 켜놓아줘서 고맙네."


* "루오." 정적 속에서 체리스의 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4세기 동안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른 적은 없었다. 그가 죽은 지 그토록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으므로. 그의 반짝이는 눈과 웃음소리를, 어울리지 않게도 과일 맛 사탕을 좋아하는 입맛을 기억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으므로. 그의 손 모양도, 둔하지만 믿음직한 손가락도, 이렇게나 선명히 떠오르는데.


* "게다가," 라리스의 반복되는 외침을 뒤덮듯이 세레셋의 목소리가 울린다. "너한텐 계획이 있잖아. 터무니없이 운에 의존하는 계획이긴 하나 그래도 또 모르는 일이니까. 나를 위해서 칠두정을 뒤엎어줘. 내 죽음이 뭔가 의미를 가지게 해줘. 얼른 시작해. 소위가 너를 두고 떠나기 전에. 빨리."


* 그녀는 육두정부의 표준 역법의 맞추어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른 역법에 따라 삶을 가늠할 것이다. 이제는 라할의 냉정하고 깔끔한 축제, 켈의 열병식, 비도나의 잔혹한 추도 의식으로 시간을 측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턴 함대가 소멸한 날이 역법의 기준이 될 것이다. 모래시계가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반란 또한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남은 삶을 그에게 바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바닷물은 사지가 잘려나가고 증발한 병사들을 기억하며, 위조 동전처럼 함부로 던져진 죽음들을 애도하며 밀려들어오고 빠져나갈 것이다.


* 등롱꾼 이단 한 명의 생명은 칠두정부 한 명의 생명과 동등한 값어치를 지닌다. 적군의 목숨은 결코 우리 병사의 목숨보다 못하지 않다. 이 간단한 수식을 그녀는 지금에야 비로소 이해했다. 그러나 켈 사령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 역법 전쟁은 마음을 다루는 싸움이다. 적절한 숫자를 적절한 마음에 대입한다면, 숫자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섬길 가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비로소 육두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가 된 것이다. 저는 주군의 총이오니. 역법 부식이 다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 스타트렉, 스타워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처럼 우주에서 펼쳐지는 전쟁과 모험을 소재로 한 스페이스 오로라 장르를 좋아한다? 다이버전트 시리즈처럼 구역에 따라 성격과 정체성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세계관에 흥미를 느낀다? 헝거게임처럼 정부군에 맞서는 반란군이 등장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렇다면 당신은 나인폭스 갬빗 시리즈의 잠재적 덕후일 것이다.


엄청난 두께와 거대한 세계관을 자랑하는 책이지만 사실 하루에 한 권씩 읽었다. 내가 넷플릭스에서 스타트렉 디스커버리까지 챙겨 보는 트레키여서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생소한 장르의 책을 읽을 때 중요한 건 얼마나 '흐린눈'이 가능한지라고 생각하는데, 이 '흐린눈' 필터의 적용이 가능한 이들에게는 가독성이 나쁘지 않은 책일 거라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따져 보자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요정의 언어를 자모음부터 공부하고 나서야 편안한 영화 관람이 가능한 사람과 그냥 '저건 극중에서 요정이 쓰는 언어구나' 인식하면 얼마든지 스루가 가능한 사람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틀과 문맥을 이해한다면 낯선 용어나 세계관의 설정도 책의 흐름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독서 능력 중 대부분의 스탯을 '흐린눈' 스킬에 몰빵 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여서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해 '덕질에 진심인 편집자가 풀어 쓴 나인폭스 갬빗 시리즈 안내서' 아이템도 준비되어 있으니 필요에 따라 이용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의 세계관 속에서는 달력 보는 방법을 바꾸면 물리학 법칙이 바뀌고 에너지가 생성된다. 그 힘은 달력을 보는 방법, 즉 '역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굳은 믿음을 보일수록 강력해지고, 무기의 에너지원이 되거나 광속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등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할 수준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국민들에게 광신도적인 추종을 강요하거나 세뇌, 고문 등의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전체주의와 군국주의 체제를 갖춘 우주 제국은 성격과 정체성이 각기 다른 여섯 개의 분파로 나뉘어 있다. '육두정부'는 '역법'을 하나로 통일하고 같은 믿음을 보이지 않는 자들을 '이단'으로 칭하며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우주 전쟁을 계속한다. 결국 공동의 목표라는 미명하에 개인은 사라지고 오직 집단과 집단의 신념만이 남는다.


전략적 요충지인 요새 중 하나가 '이단'의 손에 넘어가자 '육두정부'는 불멸의 망령인 '제다오'를 이용하기로 한다. 이 인물은 한때 명장으로 칭송받던 전술의 천재이지만 특정 전투에서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100만명 이상을 학살한 이로, 이제는 영혼만 남아 사람에게 '결박'될 수 있는 병기로 개조된 상태이다. 장교 '체리스'는 대의를 위해 제다오를 받아들이고, 하나의 육체 안에 두 영혼이 공존하게 된다.


'체리스' 본인의 수학 능력과 '제다오'의 전략으로 요새를 탈환하는 것에 거의 성공하지만 '제다오'의 계획을 알게 된 '육두정부'는 그를 죽이기 위해 폭탄을 보내 함대 전체를 날려 버린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체리스'는 목숨을 경시하고 신념을 강요하는 육두정부를 뒤엎고자 하는 제다오의 계획을 알게 되고, 그가 자행한 학살은 가장 희생이 적은 선택지였음을 알게 된다.


PS. 이 책을 추천하는 데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 또한 한몫한다. 충성스러운 엘리트 장교인 주인공도, 주인공이 호감을 느낄 만한 외모의 소유자도, 주인공의 옆에서 충언을 하고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 주는 이, 얼굴에 커다란 상처를 가진 백발의 대장 역시 모두 여성이다.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주인공을 유혹해 죽이는 것이 목적인 외계인이나 구해야 할 공주, 민폐 조종사 같은 뻔한 역할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을 통해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한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