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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진님의 서재
  • 지우개 좀 빌려줘
  • 이필원
  • 9,900원 (10%550)
  • 2022-08-17
  • : 214

“지우개 좀 빌려줘”

 

청소년 소설을 여러 권 읽다 보니 문득 의문이 생겼다. 정말 아이들은 이런 고민과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어른들이 청소년의 세계에 대한 환상이나 감상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닐까?

 

코로나로 한주씩 격주로 등교하던 2021년도 고등학교 1학년 교실에서 벌어진 실화.

“OO아, **이 좀 교무실에 오라고 해줄 수 있어?”

“**이가 누군지 몰라요.”

같은 반인데, 학년말인데 누군지 모른다는 OO이의 대답에 충격을 받고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더 가관인 스토리가 마구 나온다. 등교일에 늘 찰떡처럼 붙어있는 여자아이 둘 중 한 친구와 상담을 하면서 제일 친한 친구가 붙어다니는 친구냐고 물어보자 전화번호도 모르는 사이라는 대답. 아무리 오은영선생님께서 같은 반 친구는 “친구”가 아니다. 그저 같은 반인 같은 학교 학생일 뿐이다라고 하셨다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타인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는 아이들이 걱정되고 염려되면서 한없이 안타까웠다. 눈만 내놓고 지내온 지난 3년이 가져다 준 결과인가.

아빠를 지우지 못한 채 문구세트를 자꾸만 사다 나르는 엄마와 함께 사는 ‘우성’이란 소년이 있다. 소년에게 “지우개 좀 빌려줘”라며 말을 건 소녀가 있다.

 

엷은 갈색 눈동자는 고운 모래사장을 떠오르게 했다. 뺨에는 모래알 같은 주근깨가 박혀 있으며, 언뜻 푸른 빛깔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은 감을 때마다 린스와 트리트먼트를 빠트리지 않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윤기가 흘렀다. 머리를 쓰다듬기라도 하면 아마 손바닥에 사탕가루 같은 게 묻어날지도 모른다. 13쪽, 「지우개 좀 빌려줘」 중

 

티비에서나 볼 법한 미모의 전학생. 그런 완벽한 여학생이 늘 지각을 일삼는 ‘우성’에게 처음 보는 친구에게 말을 걸다니.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은 0.0001%가 될까말까한 일이 소설에서는 가능하다.

레이캬비크라는 이름도 낯선 나라에서 전학 온 눈부신 아이.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 전학생이 우성이에게 지우개를 빌려달라고 하며 먼저 말을 걸어오고 비밀을 말해주겠다며 귀갓길을 함께한다. 전학생의 비밀은 전학생이 ‘혹등고래’라는 것. 사람으로 변신하여 가끔 공부하러 고3교실에 왔다는 믿을 수 없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우성이에게는 좋아하는 사람이자 고래가 생겼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씩 떼어 내 오랫동안 보관하고 싶은 시간이었다. 책장 사이에 조심히 끼워 넣어 말리는 단풍잎처럼 말이다. p.24, “지우개 좀 빌려줘”

 

우성이는 지우개를 빌린다는 핑계로 전학생과의 거리를 좁혀가고 함께 노래를 듣고 영원히 고3이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이별을 맞이한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야한다는 이유를 대며 전학생은 이별을 고한다.

“지우개 많아도 다 지우지마.” 서로를 지우지 않겠다는 다짐을 남기고 둘은 이별을 맞이한다. 우성에게 지우개는 써도써도 사라지지 않던 것이었지만 어느새 아빠를 지워낸 엄마의 결단처럼 우성의 지우개도 조금씩 사라져갔다. 우성의 기억은 사라지는 지우개처럼 되지 않으려고 새끼손가락을 어루만지며 견고해지고 가슴에 남게 된다.

 

하필이면 왜 “지우개”였을까? 인간 세계에서의 친분은 지우개를 빌릴 정도의 관계로 알고 온 전학생을 통해 관계의 시작과 끝이 지우개로 연결되는 것이 흥미로웠다.

친구만들기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나이가 되어버린 사춘기 청소년에게 덜 부담이 되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며 함께 읽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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