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소설을 쓰게 된 후로 나는 줄곧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왔는데, 그것들은 주로 분노나 수치, 혐오와 죄책감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누군가의 마음에 귀기울이는, 어렵고 고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왔고 또 그런 글들을 써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때때로 그것들이 그저 내 안에서만 해결되고 마는 감정은 아닐까, 의심이 들 때가 많았다. 누군가의 불쾌와 부끄러움을 그저 이해하고 헤아리는 일. -'마음은 언제 휘어지는가' 중에서, p.50~51
소설가인 '나'는 K군에 위치한 작은 서점에서 북토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15번 국도의 한 터널에 막 들어설 무렵, 차 뒷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젊은 여자 유령을 발견하고는 숨이 턱 막힐 만큼 놀란다. 게다가 그 유령은 그날 있었던 북토크에서 만났던 독자 중 한 명이었다. 모객이 안 되었던 그날 현장에 모인 독자는 총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과 언쟁 아닌 언쟁을 벌이고 말았다. 요즘 소설에 대한 불만을 제기한 독자의 말에 이십칠 년 차 작가인 '나'는 상처를 받고 발끈했던 것이다. 독자는 소비자일까, 심판일까, 그도 아니면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일까에 대해 고민하던 그에게 불쑥 독자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 그 어떤 글도 쓸 수 없게 되는데... 과연 유령과의 기묘한 동행은 어떻게 끝이 날까.
이기호 작가의 페르소나인 소설속 '이기호' 들은 정부청사 주차장에서, 경찰서 앞에서, 북토크 현장에, 그리고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트에서 밀키트를 사와서 요리를 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리며, 욕실 바닥 청소와 베란다 청소도 했다. 계속 집안일만 하느라 짧은 소설 밖에 쓰지 못하는 소설가의 일상은 집안일 잊고 딱 한 달만 글을 쓰다 오라는 아내의 말에 들어간 문학 전문 창작 공간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집안일에서 해방되더라도, 글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더라도, 소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내리지는 않았다는 거다. 집필실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문학은 계속되고, 삶이 그렇듯 문학을 한다는 것도 대부분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문학을 둘러싼 우리 모두에 관한 보고서’이기도 한 것이다.

문학이 한 개인의 고유한 창작물인 거 같지만, 실상은 다 구조와 환경의 산물일 뿐이다.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한 해 수백 종의 시집이 발간되는가? 왜 수백 편의 단편소설이 발표되는가? 저 수많은, 수지타산 맞지 않는 문예지는 무엇인가? 다른 나라에 없는 구조와 환경 탓이다. 이제 그 구조와 환경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 K는 그런 말도 적었다. 구조와 환경에 잘 적응한 작가만이 살아남는다, 아니, 살아남았다…… -'우리는 왜 엉망이 되어가는가' 중에서, p.235
이 작품은 이기호 작가의 다섯 번째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이기호 소설가’가 필자인 보고서 형식의 소설이다. 대한민국예술원의 역사부터 시작해 존립과 위상 강화 도모를 위한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방식으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 낸다. 폐쇄적인 회원 선출 방식, 예산 대부분이 회원 수당으로 쓰이는 데 비해 협소한 사업 기능,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임에도 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의아한 존재감까지 언급하며 예산안을 개혁할 것을 제안하고, 소수에게 조용히 집중된 권력과 자원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나마 동료 예술인 인식 조사라는 항목에서 소설가, 동화작가, 시인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대목이 소설처럼 느껴질 뿐,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서처럼 쓰인 독특한 작품이었다. 소수에게 조용히 집중된 권력과 자원에 문제 제기하는 이 작품은 2021년 발표 당시 예술원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청원과 작가•예술가들의 공동성명으로 이어지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니 흥미로웠다.
이 책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 역시 문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들, 작가와 독자, 국가와 예술 등 '문학'이라는 장르를 둘러싼 일종의 보고서 같다는 느낌이 드는 이야기들이었다. 예술품인 동시에 소비재인 문학 단행본의 위상을 짚고, 독자를 의식하며 독자와 공생해야 하는 작가와 독자의 관계, 그리고 오늘날 출판 생태계의 현실까지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었다. 작가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아주 가끔 정의롭고, 대부분은 끔찍하다. 이 책은 그 마음에 대한 기록이다. 끔찍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진실도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라고 이기호 작가는 썼다. 다정함 속에 섞인 인간의 위선을 간파하고, 사랑해온 것들을 계속 사랑하기 위해 두려움을 감수하는 일, 그것이 작가에게 주어진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에게 소설쓰기란 어떤 의미인지, 독자에게 문학이란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인지, 갈등과 곤경과 지리멸렬함으로 가득한 매일의 삶을 어떻게 문학이 구원해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