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밖에선 햇살보다 더 밝게 창호지를 비추며 분분하게 낙화지던 앵두꽃도 살구꽃도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녹두빛 잎이 '연연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꽃의 흔적이 열매가 되어 부풀기도 전이건만 꽃이 지던 날은 먼먼 옛날처럼 가물거렸다. ─ 「미망 1」, 238쪽
난분분하다, 괄다, 소삽하다, 짜득짜득, 귀살스럽다... 이 중에서 뜻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말이 얼마나 될까. 대충 짐작은 하더라도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는 순우리말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난분분하다는 눈이나 꽃잎 따위가 흩날리어 어지럽다는 뜻이고, 괄다는 불기운이 세다, 소삽하다는 길이 낯설고 막막하다, 짜득짜득은 물건이 잘 끊어지지 아니할 정도로 검질긴 모양을 말하며, 귀살스럽다는 일이나 물건 따위가 마구 얼크러져 정신이 뒤숭숭하거나 산란한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이 책에 수록된 120개의 우리말들은 박완서 작가의 수많은 명작 속에서 엄선한 것이다. 자연을 닮은 말,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말, 삶을 일구는 말, 마음이 하는 말, 사람을 읽는 말이라는 카테고리로 단어들을 나누어 구성해 다채로운 낱말 사전이 되었다. 평소에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 않거나,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 많아서 더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각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와 함께 해당 단어가 쓰인 책의 한 대목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사전처럼 찾아 읽기도 좋고, 여백에 문장을 필사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귀여운 일러스트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어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며, 양장본이라 사전처럼 곁에 오래 두고 자주 펼쳐 보아도 튼튼하게 만들어 졌다.

엄마는 이미 그런 각오까지도 굳힌 듯 '구메구메' 껴주었던 혼숫감 같은 것까지 다 꺼내 내 피난 짐을 챙기면서 연방 "너라도 좋은 세상 살아야지." 하는 소리를 되풀이했다.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300쪽
박완서 작가의 책상 가까이에는 늘 사전이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나달나달해지고 결국에는 제본이 여러 조각으로 풀어졌을 정도로 열심히 펼쳐보신 두껍고 무거운 사전 덕분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단어들이 작품 속에서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단조롭고, 빈약한 어휘들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길 권해주고 싶다.
층층시하라는 말이 부모, 조부모 등의 어른들을 모시고 사는 처지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 갓난아이가 두 팔을 머리 위로 벌이고 자는 잠을 '나비잠'이라고 표현한다는 것, 두 사람의 말이 서로 어긋날 때, 제삼자를 앞에 두고 전에 한 말을 되풀이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무릎맞춤하다,라고 한다는 것 등 처음 접하게 되는 표현들이 너무 많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보깨다, 아뜩하다, 생급스럽다, 징건하다, 애면글면, 약비나다 등의 단어들은 너무 낯설어서 그 의미조차 추측이 되지 않았다. 정작 뜻을 알고 보면 친근해지는 표현들인데 말이다.

초판 한정 특별 부록으로 반년 다이어리 형태로 된 '낱말 수집 노트'를 받을 수 있다. 본책 표지와는 또 다른 일러스트로 완성되어 너무 예쁘다. 필사하기 쉽도록 360도 펼쳐지는 제본이며, 단어들을 모아 수집할 수 있도록 소장 가치를 더한 양장본으로 만들어졌다.
어느 하나 식상한 표현이 없으며, 삶의 매순간을 적확한 언어로 명징하게 그려내는 단어들로 가득한 책이다. 페이지만 펼쳐도 우리를 낯설고도 신비로운 단어의 세계로 이끌어 준다. 단순히 단어들을 모아둔 것이 아니라, 해당 단어가 표현된 책 속 구절이 같이 있으니 박완서 작가의 책을 다시 찾아 읽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 속에 담긴 단어들을 다 익히고, 필요할 때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상은 완전히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보다 선명하게, 불투명하던 생각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와 닿게 만들어 주는 단어들이었으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한글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