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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나님의 서재
  •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 배명은
  • 15,480원 (10%↓860)
  • 2026-08-25
  • : 1,550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남자가 뜻 모를 말로 투덜거렸다. 나는 죽었으나 살았다는 안도감에 울어버렸다. 눈물을 닦으려 팔을 들었는데, 손이 그 자리에 있다. 고개를 들어 하반신을 보니 다리도 제자리에 있었다. 잃어버렸던 내 몸이 다시 생긴 것이다. 

마치 일찍이 죽었으나 오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올해 귀신날도 이렇게 지나가는군,"

그렇게 닭이 세 번째로 울었다.              '1월 16일생' 중에서, p.116


졸업과 동시에 도시로 빠르게 떠났던 '나'는 오랜만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산속 시골집으로 돌아온다. 싸락눈은 그친 지 오래지만 숲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날리는 눈이 시야를 가라는 날씨였다. 오래도록 방치되어 담장도 허물어지고, 외양간과 창고 지붕도 주저앉았으며, 장독대도 깨지고 부서져 온전치 못했다. 시간이 좀먹어 무너져버린 것들 사이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집에 들어가니, 수척한 얼굴의 동생 다원이 보였다. 통통하고 잡티 하나 없던 뽀얀 얼굴은 살이 빠져 도드라진 광대뼈가 날카로워 보였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애교살이 있던 자리는 검게 그늘졌다. 머리카락은 푸석했고, 별로 좋아 보이는 꼴은 아니었다. 


깜빡 잠이 들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밤이었다. 부엌으로 가보니 다원이가 부산스레 움직이며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미역국을 끓이며 사과와 배를 꺼내 담고, 접시에 잔뜩 쌓인 음식들을 보니 영락없이 제사상처럼 보였다. 내일이 생일이라 생일상을 차리는 줄 알았는데, 웬 장난이냐고 동생을 타박하는데, 밖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정월대보름이라 달집을 태우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동생은 밖에서 소리만 들려도 화들짝 놀라며 끊임없이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고, 큰아버지는 내일이 귀신날이라 집마다 귀신 쫓는 연기를 태울 것이니 다니기에 좋지 않다며 집에 있으라고 말한다. 그날 새벽, '나'는 낯선 남자를 부엌에서 발견하고 뒤쫓았지만 놓치고, 무서워하는 동생에게 그놈이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두려움을 몰아내진 못한다. 동생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게다가 이상한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신당에서 만난 수상한 남자의 정체는 뭘까. 




동해는 하품을 하고 멍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귀를 간질이는 신호음과 저 멀리 막힌 공간에서 부서지는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습관처럼 커피잔을 들어 미지근해진 커피를 들이켰다. 조금씩 시야에 뭔가가 들어왔다.

좁은 차 안, 차창 너머를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 설핏설핏 보이는 초록색 숲. 똑딱틱톡톡틱탁탁. 규칙적인 소음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쾅쾅! 동해는 갑작스러운 충격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신을 번쩍 차렸다.                 '측백나무성의 라푼젤' 중에서, p.237~238


일본군의 총칼에 사랑하는 외할머니를 잃은 소녀는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마적들로 인해 쑥대밭이 된 상황에 소중한 보따리를 도둑맞는다. 보따리를 찾기 위해 수상한 남자를 쫓아 기차에서 내린다.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와중에 총알이 난무하는 불 켜진 기차와 점점 멀어져 끝도 없는 숲속에 들어서게 된다. 빽빽이 들어찬 자작나무들을 붙들며 조심히 나아갔지만, 사위는 점점 어두워졌고, 눈이 쌓인 숲은 거기가 거기처럼 보인다. 결국 보따리를 되찾지만, 영원히 길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남자는 보따리에 뭐가 들었든 당장 버리라고, 그게 우릴 죽일 거라고 말하지만, 소녀에겐 소중한 것이었다. 주위엔 작고 푸른 빛들이 곳곳에 피어올랐고, 남자는 그것이 죽은 자들의 혼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두 사람은 깊은 숲속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전작들을 통해 신화와 설화 등을 현대적이고 장르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독보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던 배명은 작가의 신작이다.  초기작부터 최근 작까지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일제강점기로 시간 배경을 옮기고, 우리 나라 도깨비인 갓귀와 야강귀가 등장하고, 라푼젤에서 모티프를 얻어 측백나무와 울타리에 둘러싸인 집에서 벌어지는 공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담 너머 어둠의 세계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특히 귀신과 도깨비가 등장하는 토속 호러에 호기심이 많다. '직접적이지 않은 허구의 이야기로 안전한 두려움을 선사하는데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호러를 쓰게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 내면의 깊숙한 정서와 맞닿아 있어 매번 인상깊게 읽어 왔다. 초현실적인 공간과 현실적인 공간을 자유자재로 가로지르며 보여주는 공포가 익숙한 곳마저 낯설게 느껴지게 만들어 주곤 했다. 자, 환상적인 이야기로 지극히 현실적인 공포를 보여주는 배명은표 호러의 세계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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