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하비의 위대함은 ‘발견’보다
방법의 혁명에 있었다. 그는 권위자의 글이 아닌 자연의 증거를 따랐고,
추론보다 실험을, 사색보다 계산을 선택했다. 그의
연구는 데카르트, 갈릴레오, 뉴턴으로 이어지는 근대 과학의
기초 위에 놓였다. 하비는 생리학의 토대를 바꿔놓은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책이 아니라, 자연을 해부했다.” 그의
가설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가설에서 출발한 추론은 훌륭한 실험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과학이 발전하는 방식이자, 하비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이다. p.53
우리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을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있을까? 의학의
진보는 천재의 섬광이 아니라, 평범한 관찰을 끝까지 설명하려는 끈질긴 사고에서 시작되었다. 지금은 '비타민'이라는
말을 너무도 익숙하게 사용하지만, 인류가 이 물질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불과 100년 전이다. 비타민의 발견은 왜 어떤 병은 무언가가 들어와서가
아니라 무언가가 부족해서 생기는 걸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의과학사적 성과와 의미가 큰 혁명의 순간의 출발점에는 하나의 과학적 질문이 있었다. 이 책은 그렇게
과학과 의학의 위대한 발상과 눈부신 성취들을 담았다.
인체를 복부, 흉부, 두부
순으로 해부하는 절차를 제시하며, 해부의 순서와 방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유럽 최초의 해부 실습 교재 <인체 해부학>은 르네상스의 예술가와 과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예술가이자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시 이 책을 참고해 자신의 인체 연구를 체계화했다고
하니 말이다. 16세기 중엽에는 젊은 해부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등장하는데, 그는 해부를 다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과학적 관찰의 행위로 되돌린 인물이다.
혈액의 순환 이론을 통해 생리학의 토대를 바꿔 놓은 윌리엄 하비, 생명을 수학으로 해석했던
데카르트, 17세기 초에 열을 재는 도구로 만들어진 온도계 등 의학사에서 중요한 발견과 발명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생명의 신비와 의학의 난제를 밝히는 경이로운 과정들이 있었기에, 현대 의학의 덕을 우리가 보고 있는 거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한 학생이 발견한 작은 섬, 전쟁을 겪은 의사의 새벽 메모, 그리고 허름한 실험실에서 뚝심 있게 밀어붙인 아이디어. 의과학의
전환은 종종 더 많은 데이터가 아니라 문제를 다시 배치하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인슐린은 당뇨병을 정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도 다르게 배치하면 풀릴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의학의 역사는 종종 한 순간의 기적으로 기억된다. 침대에 누워
있던 환자가 다시 일어서는 장면, 불치로 여겨졌던 병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은 순간. 그 장면이 시작되기 전에 작은 기적의 씨앗은 언제나 훨씬 앞쪽에 있다. p.333~334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았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었다. 수없이 봐온 그림인데도, 그림 속 패턴들이 적혈구의 전형적인 형태와
닮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기 때문이다. 황금빛 장식 사이로 작은 붉은 원형들이 반복해 나타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원형들은 중심이 옅고 가장자리가 진한 도넛 모양을 하고 있다. 그것을 클림트가 활동하던 시기에 출판된 백과사전에 실린 혈액의 컬러 도판과 비교해보면, 매우 그럴듯한데 덕분에 20세기 초 빈에서는 예술과 의학이 긴밀히
교류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클림트의 그림에 숨겨진 생물학적 도상,
이른바 ‘클림트 코드’를 해석한 저자의 연구는
세계 3대 의학저널인 《JAMA》에 소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과학 교양서 《클림트를 해부하다》를 펴내기도 했다고 하니 찾아서 읽어 봐야겠다.
이 책이 특히나 흥미로웠던 것은 150여 장의 도판 등 다채로운 시각
자료들이었다. 최고의 명화부터 잡지 표지와 삽화, 사진과
냅킨에 그린 스케치까지 수록해 이미지로 의과학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준다. 베살리우스가 기획한
근육편 삽화, 하비의 혈액순환 도해, 레이우엔훅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미세 생명체의 스케치, 런던 콜레라 환자 분포 지도, 뇌와
인체의 관계를 다룬 호문쿨루스 모형, ‘구원자’ 페니실린을
담은 전쟁 포스터, 왓슨과 크릭이 세운 DNA 이중나선 모형
등 굉장히 자료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좋았다. 그리고 단순히 의학사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의과학자들의 질문과 사고 과정에 주목해 수많은 혁신의 순간들 뒤에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풀어내고 있어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결과보다 질문에, 정답보다 그에 이르는 경로를 추적하고 있어 발견과
발명에 이르게 한 사고 과정, 아이디어의 씨앗, 연구자의
태도까지 함께 만날 수 있었다. 의학은 어렵고 차갑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과학사를 색다른 방식으로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