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됐는데, 멀린은 책을 끝까지 다 읽은 사람처럼, 한두 번이 아니라 열 번도 넘게 읽은 사람처럼 말한다는 뜻이야. 만약 내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내가 멀린이 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책을 처음 읽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니까 바로 다음 페이지에 무슨 내용이 나올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다 아니까. 그다음 페이지도, 다음다음 페이지도, 마지막 페이지도 모두. - 김연수, '우리들의 실패' 중에서, p.65
김연수의 <우리들의 실패>에는 대통령 친인척의 국정 개입 사건에 연루된 인물 ‘손동하’가 나온다. 기자인 '나'가 그를 인터뷰한 내용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방식이다. 손동하가 파산과 구속을 각오하고 폭로에 나서겠다는 결심을 한 뒤, 비상계엄 선포,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가결, 대통령 탄핵안 가결,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 몇 달의 기간 동안 사람들은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불확정의 시간을 견뎌야만 했던 것이다. 과연 대의를 위한 자기희생이 가치 있는 것일까. 스스로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공공을 위해 윤리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작품은 소설임에도 우리의 현실과 단단히 맞닿아 있어 공감하고, 함께 고민하며 읽었던 것 같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정적 순간>에서는 평소에 존경하던 사진작가의 전시회를 준비하던 주인공이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사진작가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의 아틀리에에서 혼자 작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책장 구석에 놓인 상자를 발견하게 된다. 무심코 뚜껑을 열었고, 맨 위에 놓인 이미지를 보는 순간 온몸이 굳어 버린다. 초등학교 6학년쯤 되는 소년이 전라 상태로 사진 속에 있었던 거다. 게다가 비슷한 종류의 사진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물론 당사자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사건의 정황도, 진실도 알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못본 척 침묵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주인공이 처한 윤리적 딜레마를 도록의 일부, 법률의 발췌, 노트의 인용문, 신문 기사, 챗지피티와의 대화 등을 숏폼 영상이나 SNS 타임라인 등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교차 편집해서 보여준다. 독자 스스로 자기 나름의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잘 정리해서 보여주는 영화처럼 말이다.

왜 그때 그 상자를 열었을까. 다시 그 생각으로 돌아온다. 열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시회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 세계가 어딘가에 있다면 지금 이 세계의 나를 잃더라도 그곳에 가고 싶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 피해자가 있다는 걸 모른 채 전시회 성공을 기뻐하는 나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나도,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아니다. - 히라노 게이치로, '결정적 순간' 중에서, p.167~168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두 작가가 ‘문학’이라는 공통 언어를 통해 우리가 하나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연결’의 기획으로 시작된 '크로스' 시리즈 그 첫 번째 책이다.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 김연수와 히라노 게이치로가 함께 했고, 이어질 두 번째 책은 천명관, 천쓰홍 작가가 함께 할 예정이다. 이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해외 작가 한 명과 한국 작가 한 명이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새로운 중단편소설을 창작하고, 그 두 편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서로의 텍스트를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두 작가가 '크로스'를 경유해 도달한 장소가 어딜지 상상하며 읽어보자.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두 작가의 작품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이 시리즈만의 장점이다. 두 작가의 소설이 한 편씩 읽고 나면 두 작가의 문학적 대화가 펼쳐지는 크로스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살고 있는 세계도, 언어도, 살아온 배경도 다르지만 '문학'이라는 공통 언어를 공유하고 있기에, 두 작가의 세계가 교차하는 순간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 김연수 작가는 <우리들의 실패>라는 작품을,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작품을 썼다. 두 작가는 두 차례의 원격 화상 대화를 거쳐 '윤리적 딜레마'에서 소설을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것에 서로 동의했다. 세상 모든 소설은 딜레마에서 시작된다고 본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리적'이라는 부분이다. '윤리적'이라고 할 때, 옳고 그름, 진실과 거짓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기보다 나의 옳음, 나의 진실 그 자체에 대한 번민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두 작품은 그러한 딜레마를 잘 보여주고, 또 독자들로 하여금 사유하게 만들어 준다. 소설을 읽고 나서, 크로스 인터뷰를 통해 두 작가님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