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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나님의 서재
  • 마지막 홍콩배우 양조위
  • 주성철
  • 25,200원 (10%1,400)
  • 2026-02-13
  • : 8,220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말보다는 눈빛과 공기로, 표현하기보다는 침묵을 통해 역사와 시간을 봉인하는 두 인물에게서, 얼핏 전혀 다른 세계처럼 보이는 허우샤오시엔과 왕가위 사이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접점을 목격한다. 양조위는 그 불가능할 것 같은 만남을 가능하게 했다. 영화는 다른 예술과 달리 침묵을 미학으로 만들고,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 것마저 이야기로 만든다.... 세상의 시간을 정지시키고 우주의 운동을 잠시나마 멈추게 하는 그 경지를, 우리는 양조위의 얼굴에서 보았다.                p.101


<중경삼림>,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 <무간도>, <색, 계>, <일대종사> 등 40년 동안 홍콩영화의 시간 속에서 우뚝 서 있는 배우 양조위. 그의 삶과 작품을 통해 지금은 쇠퇴해가고 있는 홍콩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주 특별한 책을 만났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을 통해 장국영이라는 배우를 추억했던 주성철 작가가 이번에는 홍콩영화의 현재를 지키고 있는 배우 양조위를 기록했다. 




이 책은 양조위의 연기 인생을 집대성한 전 세계 최초의 평전이기도 해서 더욱 의미가 있다. 문학, 미술, 음악 등 다른 예술과 달리 영화에는 관객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배우'라는 존재가 있다. 그래서 최근 안성기 배우의 부고를 들었을 때 마음이 쓰였던 것처럼 배우들의 시간은 우리 각자의 삶과 함께 흘러가며 역사를 쌓아가는 것 같다. 


홍콩은 어느 골목에서는 <중경삼림>을 만나고, 어느 식당에서는 <화양연화>가, 어느 밤거리에서는 <천장지구>가 떠오르는 나라이다. 홍콩을 생각하면 몰려드는 거대한 이미지들은 대부분 홍콩영화 속 그것이 아닐까 싶다. 허름하고 빽빽하게 자리잡고 있는 건물들을 보며 꼭 홍콩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하고, 양조위가 거닐었을 법한 거리를 찾기 위해 밤거리를 돌아다녀 본 적도 있다. 나처럼 홍콩과 홍콩영화를 함께 기억하고 있다면, 이 책이 정말 선물처럼 느껴질 것 같다. 실제로 이 책을 읽는 내내 오래 전 홀릭했었던 그 시절 홍콩 영화들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지 않았을까. <중경삼림>을 보며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 빠져본 적이 

있다면 말이다. 



"새해는 무슨 새해야, 그냥 살아가는 거지."

마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살면 살아진다"라는 대사를 연상시키는 이 말은, 영화 <류맹의생>(1995)에서 '양아치 의사' 혹은 '츤데레 의사'라 불리는 양조위가 새해 파티를 제안하는 사람들을 물리치며 투덜대듯 내뱉는 대사다. 이 장면을 무척 좋아한다. 1년 365일 중 4월 1일이 되면 우리가 자동적으로 장국영을 떠올리듯, 연말연시가 되면 SNS에 이 대사가 담긴 양조위의 '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p.238


이 책은 표지사진부터 특별한데, 지금껏 세상에 공개된 적 없는 <해피 투게더> 촬영 당시의 미공개 현장 스틸이기 대문이다. 그리고 이 사진을 초판 한정으로 도서에 삽지된 엽서로도 소장할 수 있다. 이미 유명한 배우였을 때 영화에서 만났기에, 그의 무명 시절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그가 배우로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 과정을 만날 수 있어 더 뜻깊은 시간이었다. TVB ‘오호장’의 막내로 사랑받던 청춘기부터 허우샤오시엔과 오우삼을 거쳐 홍콩영화 뉴웨이브의 중심에 섰던 도약기, 왕가위의 페르소나로 고독과 침묵의 미학을 완성한 시절까지 이 책을 통해 모두 만나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방대한 자료와 사진들을 바탕으로 쓰였기에 우리를 홍콩영화에 열광했던 그 시절로 데려간다. 영화잡지 〈키노〉를 시작으로 〈필름2.0〉, 〈씨네21〉을 거쳐 <씨네플레이>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는 영화평론가 주성철은 홍콩영화 전문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특유의 입담과 깊은 통찰과 섬세한 해석이 페이지마다 고스란히 묻어져 있어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장국영의 적극성과 대비되는 양조위의 소심함이라는 미덕, 악역의 얼굴 뒤에 숨겨진 끝없는 슬픔, 언제나 영화 속에서 말을 아끼고 상대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며, 주변의 공기마저 정지시키는 고요한 침묵의 순간을 창조해내는 배우... 등 잘 직조된 문장으로 한 배우의 드라마틱한 필모그래피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도 이 책의 매력이다. 


'화려함보다 소박함을 택하고 과시보다 절제를 앞세우는, 그래서 날카롭게 번쩍이는 칼날이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 은은한 광택을 드러내는 도자기 같은' 배우 양조위를 통해 이제는 멸종 위기에 처한 홍콩영화의 시간 속으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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