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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나님의 서재
  • 한 치 앞의 어둠
  • 사와무라 이치
  • 15,300원 (10%850)
  • 2026-01-25
  • : 10,010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기요, 죄송한데 어머님이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저는 아까부터 혼자 있었는데요."

"고, 고객님, 무슨 농담을 하시는 건가요. 처음부터 계속 같이 계셨잖아요."

"네에?"

"왜 그렇게 놀라세요? 지금도 옆에 계시는데. 보세요, 분명히 계시잖아요."                  - '부동산 임장' 중에서, p.100


나는 중개인과 함께 집을 보러 다니는 중이다. 집에서는 잠만 자면 된다고 했기 때문에 까다롭게 볼 생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죄다 '사연 있어 보이는 집'들 뿐이다. 복층 난간에 누가 긁어놓은 것 같은 흠집이 있다거나, 벽장 내부를 새하얗게 칠해두었다거나, 한쪽 마룻바닥만 쑥 들어가 있다거나 하는 식으로 기피 매물처럼 보이는 집들이다. 그러다 드디어 가격대에 맞고, 마음에 드는 집을 찾게 된다. 묘지 옆인데 괜찮냐는 중개인의 말에 집이 넓고 깔끔해서 상관없다고 계약서를 작성하러 가려는데, 갑자기 중개인이 어머님도 동의하시냐고 묻는다. 자신은 처음부터 혼자 나왔는데, 대체 무슨 소리일까. 중개인은 상복같은 옷을 입은 한 여자가 지금도 옆에서 방글방글 웃고 있다고 처음부터 같이 오지 않았냐고 하는데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중학교 3학년 무렵에 가족들과 2박 3일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부모님과 나, 남동생까지 해서 네 명이 서일본의 어느 산간에 있는 작은 호텔에 갔다. 30년 전이라 당시는 스마트폰은커녕 인터넷도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할일이 없어 방에서 뒹굴거리는 중이었다. 프런트 데스크에서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볼 수 있다고 해서 동물이 나오는 모험 영화와 고질라를 빌려 온다. 그런데 기기에 비디오테이프를 넣자, 갑자기 화면이 확 밝아지더니 객실과 똑같은 형태의 일본식 방이 나왔다. 화면 속 누워 있던 여자가 이불에서 나와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얘, 사토루. 라고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닌가. 얼굴이 부딪칠 정도로 카메라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는 계속 사토루를 부른다.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화면 속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동생까지 고질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족들은 내가 봤던 영상을 보지 못한 것이다. 영화를 보다 내가 잠이 든 것일까? 대체 그 이상한 영상의 정체는 뭐였을까. 




"죄송한데,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요."

"아니,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를 데리러 오지 않으셔서요.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도 연결이 안 되고. 이런 시간이라 정말 무슨 일이 생긴 줄만 알고......"

"장난치지 마세요. 늘 가던 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갔잖아요."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아드님은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니, 그게 무슨......"                  - '다리 아래' 중에서, p.140


평범한 현실 속 뒤틀린 인간 심리를 건드리며 극한의 공포를 끌어내는 작품을 보여주었던 사와무라 이치의 신작은 초단편 괴담집이다. <보기왕이 온다>, <즈우노메 인형>, 《시시리바의 집》으로 이어지는 히가 자매 시리즈로 만났었는데, 오랜만에 만나는 신작이라 기대하며 읽었다. 사와무라 이치의 전작들이 꽤나 오싹하고 무서웠던 기억이 있는데, 초단편으로 만나는 호러는 또 어떤 느낌일지, 이번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했다. 평범한 현실 속 뒤틀린 인간 심리를 건드리며 극한의 공포를 끌어냈던 <보기왕이 온다>에서는 평범한 일상을 파괴해가는 정체불명의 괴물 ‘보기왕’이라는 존재를 통해 '사람의 마음에 생겨나는 틈'에서 비롯된 공포를 그려냈었다. <즈우노메 인형>도 전작만큼이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어 준 무시무시한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중반 이후 '저주로 사람을 죽이는 도시전설'이라는 것이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더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시시리바의 집>은 고딕 호러 장르의 대표적인 소재인 ‘귀신 들린 집’을 사와무라 이치 스타일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었다. 이후에도 히가 자매 시리즈는 두 편이 더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나같이 오싹하고 섬뜩한 이야기들이었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짧게는 2-3쪽, 길게는 20쪽 내외의 초단편 21편을 통해 일상 속 평범한 공간을 한순간에 오싹한 장소로 바꿔 버린다. 서사가 완벽한 구성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가 갑작스럽게 끝나 버리는 초단편이기 때문에 '진짜'처럼 느껴지는 공포가 있다. 잘 만든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짧은 이야기라 그만큼 몰입도도 뛰어나고, 여운도 길게 남는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은 혼란이, 그 후에는 자꾸만 생각나면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깨달음이 오는 것이다. 누군가 실제로 겪었던 경험이나 나에게도 일어날 법한 일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초단편으로 쓰인 괴담이 가진 힘이 아닐까 싶다. 출퇴근길 전철에서 목격한 이상한 현상,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본 경험, 매일 반복되는 풍경이 어느 날부터 조금씩 다르게 보였던 일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낯설고 기묘한 일들은 순식간에 무서운 상상 속 세계로 우리를 데려간다. 등줄기를 따라 오싹한 한기가 지나가고,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진짜 무서운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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