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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나님의 서재
  • 잠든 나의 얼굴을
  • 임수지
  • 15,300원 (10%850)
  • 2025-11-07
  • : 2,590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강아지 인형은 어디로 갔을까. 언제 버려졌을까. 누가 버렸을까. 설마 내가 버린 걸까. 내가 어느 시기를 그렇게 졸업해버린 걸까. 나는 카페를 향해 걸으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 그때 내가 좋아했던 색색의 젤펜과 샤프펜슬은 또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것 또한 내가 버린 것일까. 어쩌면 집에 있을지도 몰라. 돌아가면 그것들을 찾아봐야지.                p.78


나진은 며칠만 할머니를 돌봐줄 수 있겠느냐는 고모의 전화를 받고 광주로 향한다. 그 집은 나진이 열 살부터 10년 간 지냈던 곳이기도 하다. 부모의 이혼으로 고모가 함께 살던 할머니 집에 맡겨진 채 어린 시절을 보냈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에 지어진 10층짜리 아파트의 6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오른쪽에 있는 집이 할머니 집이었다. 네 개의 방 중에 안방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썼고, 현관문 왼쪽 방은 고모가, 오른쪽 방은 할아버지의 서예방이었다. 창고로 사용 중이던 부엌 옆에 딸린 작은 방이 나진의 방이었다. 그렇게 임시의 방에, 임시로 가족의 일원이 된 나진이 살게 된 것이다. 당시 이십대 후반의 나이에 백화점에서 일하던 고모는 나진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진은 엄마 대신 그런 고모를 보며 자랐다. 


고모는 짧으면 3일이지만 더 길어질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캐리어와 더플백에 백팩까지 이고 지고 스노보드를 타러 떠났다. 그리고 나흘이 지났지만 고모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는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닐까 싶은 알 수 없는 불안 속에 나진은 돌아오지 않는 고모를 기다리며, 할머니와 일상을 보내기 시작한다. 회사에 전화해 일주일만 더 쉬겠다고 말을 하고, 학창시절 친구를 만나고, 그 시절 걷던 길을 걸으며 이곳에서 보냈던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바쁘게 살아 가느라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고, 골목길에서 마주하고,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떠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고모에 대해 생각해 본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는 고모, 무언가를 먹는 고모, 잠든 고모, 무표정의 고모...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의 고모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나진은 고모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 긴 시간을 한 집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과연 고모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다시 돌아오긴 하는 걸까. 




나는 지금의 나와 초등학생인 나, 중학생인 나, 고등학생인 나를 여러 색의 셀로판지를 겹치듯 구깃구깃 포갠 상태로 걸었다. 나는 언젠가 이 길을 걸으며 풀이 죽어 있었고, 언젠가는 신이 나서 몸의 무게를 잊고 뛰어다녔다. 울었던 적도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나는 혼자 있을 때만 울었다. 혼자 있을 때도 소리 없이 울었다. 몸 깊은 데부터 울음이 조용히 끓어 오르기 시작하면 왼쪽 귀 안에서 드드드 무언가 작게 떨리는 소리가 났다.              p.222


기성 작가와 신인 작가를 아우르며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신설한 아르떼문학상이 올해로 제2회를 맞이했다. 이 작품은 총 503편의 응모작 가운데 심사를 거쳐 만장일치로 당선된 작품이다. 임수지 작가의 첫 작품이기도 한데, "심사하고 있다는 걸 잊을 정도로 좋았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해 매우 궁금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소소한 일상의 힘을 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1인칭 화자의 담담한 묘사로 말해지는 서사는 평범해서 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고, 빽빽하지 않은 구성 속에서 느껴지는 여백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들어 준다. 


드라마틱한 사건도, 긴장감 넘치는 전개나 인물들 간의 갈등도 두드러지지 않는, 그저 조용하게 흘러가는 듯한 작품이었다. 도파민 터지는 자극적인 소재로 넘쳐나는 요즘 같은 세상에 다소 밋밋한 서사를 따라가는 것이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심심한 하루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차곡차곡 쌓인 감정의 둑이 툭 터지는 순간이 온다. 누구나 머릿속에서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파라라락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처럼 펼쳐지는 순간을 한번쯤 겪게 되는데, 그 소중함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실제 작가의 할머니는 1936년생으로 올해 구순을 맞이하셨다고 한다. 할머니와 함께 쌓인 시간들도 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겼을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쓰면서 시간을 자꾸 걸었다'라고 말하는데, 그때 무언가를 마주했던 것 같다고, 소설은 생각지도 못했던 걸 가능하게 한다고 작가의 말에서 썼다. 그 귀한 순간들을, 소중한 깨달음을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느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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