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설마."
그럴 리 없다. 지난 23년간 줄곧 면역인이었다.
만약이라는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강한 거부감이 밀려왔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라는 단어는 이 모든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 p.77
전 세계적인 토양 오염 이후 이제껏 인류에게서 볼 수 없었던 뿔을 가진 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도시마다 비율의 차이는 있으나 전체 인구의 절반은 각인이었고, 나머지는 면역인이라 불렀다. 각인은 뿔을 가진 인종이라고 멸시받았고, 아름다운 뿔을 노리는 커터의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뿔이 자라거나 회복할 때는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 했는데, 고통을 덜기 위해서는 흑각을 구해와야했다. 세계는 지상과 지하, 그리고 공중도시 라뎀으로 나뉘어 있었고, 자본가와 면역인을 위한 성역이 되어버린 라뎀이 도시 전체를 지배하고 통제했다. 라뎀은 재배부터 유통까지 엄격하게 관리한 흑각을 구매해 먹도록 했지만, 각인인 뱅커가 한 덩이에 40페이짜리 흑각을 고민 없이 집어 들어 살 수는 없었다. 결국 뿔이 자라는 고통은 각인과 그 가족이 감당해야 할 과제가 되어 버린다.
시진은 태어날 때부터 줄곧 빛이 들지 않는 그늘에서 자라왔다. 시진은 면역인으로 태어났지만, 가족 중 유일하게 누나는 '각인'이었다. 누나는 그로 인해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 했고, 그래서 시진은 열 살 때부터 암석사막으로 나가 흑각을 구해와야만 했다.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신 뒤 세상에 둘만 남게 된 남매는 서로를 누구보다 아꼈지만, 각인과 면역인이라는 차이에서 오는 거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계속 오해를 쌓았고, 결국 자신의 삶을 비관하던 유진이 행방불명되고 만 것이다. 시진은 포기하지 않고 누나를 찾으면서, 암석사막의 야생 흑각을 불법 채취해 납품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평범했던 시진의 일상은 이웃이자 친구였던 ‘베르트’가 각인 혐오자에게 살해를 당하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시진은 친구의 사망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24시간 내내 햇볕이 들지 않는 위험한 지역 코어와 그늘을 넘나들며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산산이 조각난 세계에서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한 시진의 모험은 어떤 비밀들과 만나게 될까.

동시에 '결코 가는 일 따위 없을 것'이라 장담했던 공중도시의 밤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시진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시진은 꿈속에서 아주 생소한 장소에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체로 익숙하거나 직접 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시진은 거길 꿈의 입구라고 불렀다. 그러나 꿈이 흘러갈수록 일상에 없던 오류나 예외가 막무가내로 끼어들고 그때마다 새로운 당혹감과 충돌해야 했다... 지금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p.390
위픽 시리즈 <2학기 한정 도서부>와 핀 시리즈 장르 <부적격자의 차트>로 만났던 연여름 작가의 신작이다. 2005년, 영국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본 작가는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을 떠올린다. 이 소녀가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방법은 없었을까? 작가는 그렇게 미술관에서 강물에 빠진 오필리아가 죽기 전에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보며 ‘마침내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한다. 본격적인 작품 집필에 착수한 이후 장장 4년에 걸쳐 완성되었기에 탄탄하게 잘 직조된 서서가 만들어 졌다. 도시의 이름을 비롯해서 작품 여기저기에 셰익스피어의 희곡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재미를 안겨 준다.
주권과 정체성을 빼앗긴 도시에서 방향을 찾고자 분투하는 소년의 이야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는 현실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세상은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으니까. 누구도 배척당하거나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 작가가 작품을 집필하면서 참고한 도서의 목록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사태를 다루고 있었다고 하는데, 매일같이 생사를 다투는 이들의 삶에 대해서 고스란히 이 작품에 담긴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부재함'보다는 '존재함'으로, '사라짐'보다는 '드러남' 쪽으로 향하기를 바라며 소년의 여정을 그렸다고 말한다. 소설 속에 그려진 참혹한 현실은 허구이지만 현실 속 그것에서 결코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어느 곳에는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매순간 무참히 죽어가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우리가 더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삶의 가치들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