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피오나님의 서재
  • fin
  • 위수정
  • 13,500원 (10%750)
  • 2025-10-25
  • : 1,930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옥의 머릿속에는 스틸 컷으로 저장되어 있는 무수한 파일들이 있었다. 불면의 밤이면 그 파일들이 하나씩 재생되었다. 과거로 과거로 향하는 그 파일들에는 기옥의 실수와 실패와 상처와 기쁨과 환희의 순간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것의 내용이 무엇이건 그것이 과거라는 사실만으로 기옥은 공허해졌다. 어둠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기쁨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에. 어두운 방 안에 빠르게 늙어가는 내가 홀로 누워 있기 때문에.            p.55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 마지막 공연이 끝난다.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극장을 가득 메웠고, 배우들의 커튼콜이 시작된다. 주인공 메리 역을 맡은 중년의 배우 기옥은 스캔들을 딛고 8년 만의 연극 공연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50대 여배우는 무대의 안과 밖이 불과 몇 발자국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늘 고민한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한결같이 살뜰히 보살피는 매니저 윤주는 기옥을 비롯한 연예인들 모두 하는 일에 비해 돈을 많이 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가진 부는 과연 그들의 노력만으로 얻은 것일까 속으로 생각하며 코웃음을 친다. 윤주는 기옥을 위하면서도 언제부턴가 그 반대의 욕망이 자신의 내부에서 충돌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기옥의 상대역인 남편 제임스를 맡은 태인은 연극으로 시작해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에 진출한 배우였다. 그의 처가가 유명 중식당을 운영하는 재력가라는 사실은 연극판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술버릇이 좋지 않다는 소문 또한 업계에서는 잘 알려진 얘기였다. 젠틀한 외모 덕분에 대중들은 그의 주사를 루머 정도로 취급했지만, 언젠가 증거가 발각되면 배우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다. 그는 만취하면 한 명에게 꽂혔다. 어린 여자 스태프인 경우도, 선배 배우거나 술집 종업원인 경우도 있었다. 추근거림이나 비아냥의 형태로, 또는 짖궂은 농담이나 지나친 칭찬 세례일 때도 있었는데, 무엇이든 상대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한달 간의 연극 공연이 끝난 뒤 벌어진 술자리에서 하필 태인이 꽂힌 상대는 운이 없게도 기옥이었다. 주변에 앉아 있던 이들을 모두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불쾌한 언사가 이어졌지만, 기억은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그 자리를 이겨낸다. 그리고 다음 날, 태인이 새벽에 지방 별장으로 내려가다 교통 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 오고 기옥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나는 한 치 앞을 예감한다. 그걸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다. 상호가 고개를 돌려 내 팔을 잡는다. 그 힘이 달콤하다. 하지만 상호야, 이것은 운명도 뭣도 아니다. 행운도 불행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누구를 탓할 수 없다. 그게 무엇이든 아주 작은 먼지에 불과하다. 이제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홀로 남았다.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타오르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그것은 비명이자 환호.             p.142~143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 쉰여섯 번째 작품은 위수정 작가의 <fin>이다. 자신만의 고통과 고독을 품은 채 그 감정들을 감추고 살아가는 네 남녀의 욕망으로 질주하는 삶이 단막극처럼 펼쳐지는 작품이다. 핀 시리즈는 늘 작품과 잘 어울리는 아티스트와의 작업으로 표지를 만들었는데, 이번에 책과 함께 받은 책자를 보니 아티스트별로 시리즈를 정리해 두었는데, 확실히 분위기가 각각 달라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더 좋았다. 


이 작품은 두 명의 배우, 그리고 각자의 메니저까지 네 남녀의 각기 다른 삶을 통해 선망과 질투, 분노와 연민, 동경과 증오 등으로 점철된 복잡 미묘한 우리 인생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천천히 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암전되며 한 편의 연극이 끝나면, 무대 뒤와 무대 바깥에서의 삶은 그제야 다시 시작된다. 그러니 이 작품은 시작과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도 하다. 무대 위 연극은 삶을 가장하고 연출되지만, 정작 무대 밖 일상에서도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게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조금씩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 싫은데 그렇지 않은 척, 좋은 데 티내기 싫은 척, 환멸과 분노를 감추고, 고통과 외로움을 모른 척 외면하면서 말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각자의 인생에서 스스로가 맡은 배역은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