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금까지 승혜가 살아온 이력일 터였다. 이번 생에서 누군가를 위해 제대로 뜨거워져본 경험도 없으면서 다음 생에서 맥반석으로 살고 싶다는 게 너무 뻔뻔한 욕망이었을까. 혹시 맥반석의 세계도 경력자 같은 신입을 원하는 걸까. 맥반석이 되고 싶으면 그 정도의 온도를 감당할 만한 내공을 쌓고 오라는 경고인 걸까. 참나, 돌이 되는 것도 쉽지 않구나 싶으니 지난 생에 대한 후회나 반성보다는 빈정이 먼저 상하고 말았다. p.35~36
다음 생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자율적으로 선택이 가능한 '생애전환 시행령'이 국민 법안으로 채택된 세상이다. 사람들은 만 40세와 만 66세에 건강검진을 받으며 생을 전환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게 된다. 인간 여자로 66년을 살아온 승혜에게도 두 번째 생애전환기 건강검진의 때가 온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승혜는 고민한다. 막연히 뭔가 좋은 게 되고 싶었던 승혜는 1지망으로 맥반석을 적어내지만 '전환불가' 통보를 받는다. 두 번째에는 아무 수식어 없는 자질구레한 돌을 선택하지만, 자연 상태의 무생물이 되려면 우선 갚아야 할 빚이 없어야 했다. 결국 돌고 돌아 승혜가 부여받은 새로운 생은 타자기였다.
누구는 맥도날드 키오스크가 되고 누구는 AI 기능을 탑재한 청소기가 되었다고 했다. 쓰임이 많을수록 빨리 유보된 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데 승혜는 기계치에 가까웠다. 최종까지 승혜가 망설인 것들 중에는 고양이 요람과 리코더, 호루라기와 피크닉 바구니, 그리고 타자기가 있었다. 타자기는 적당히 낡은 데다 대단히 새로운 기술을 익히지 않아도 되었고, 자신의 생각의 의지 없이 타인이 쓰는 글을 그대로 받아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 마음에 들어 오래 고민한 끝에 선택하게 된 것이다. 타자기에도 수명이 있어 승혜는 자주 아프고 열에 시달렸지만, 그럼에도 듣기와 기다림의 삶인 타자기의 생을 사랑하게 된다. 빈티지 숍의 아르바이트생 주희가 승혜를 처음 사용했는데, 찰스 부코스키의 <할리우드> 속 문장을 써서 부착한 이후 승혜는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로 불리게 된다.

타자기의 생을 승혜는 사랑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대로 영영 살아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승혜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타자기에는 분명한 수명이 있었다. 잦은 비명과 드문 탄성을 반복해서 겪는 동안 승혜는 자주 열이 올랐고 자주 한기에 시달렸다. 타자기의 생에도 갱년기의 시간이 도래한 모양이었다. 한번은 지나치게 뜨거워져 사흘 내내 열을 식혀야 했고 한번은 지나치게 얼어붙어 타자의 절반이 제대로 눌리지 않았다. 승혜를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p.57
만 40세까지 인간 종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적절한 성취를 이루지 못하면 무생물로의 전환은 당연한 수순이 되었다는 문장을 보며 슬퍼졌다. 아프면 치료할 돈이 있고, 돌봐줄 가족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인간으로서의 미래를 선택할 수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노후 자금이 준비되지 않은 하위 소득 계층의 중장년층일수록 일찌감치 사회적 돌봄 비용이 들지 않는 무생물로의 전환을 결정하고, 극중 승혜와 같은 방식으로 노인 1인에 드는 복지 비용을 당겨쓴다.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이렇게 나이 든다는 것, 말과 기억을 잃어가고 몸이 허물어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간 여자 고승혜의 몸은 쉰 살 나이에 시작된 오십견부터 건망증에 이르기까지 점점 노화된 몸의 한계를 겪어 왔다. 타자기가 된 고승혜 역시 점점 몇몇 키는 이제 잘 눌리지 않게 되는 등 몸이 둔해지고 있었다. 승혜는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이 작품은 <고독사 워크숍>, <복미영 팬클럽 흥망사> 등의 작품을 써낸 박지영 작가의 신작이다. 너는 늙어서 뭐가 될래?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해변의 타자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작가는 '고승혜 타자기'를 통해 자신이 상상했던 생의 마지막 장면을 그려 낸다. 극중 전환기에 무생물의 생을 선택하는 건 빈곤하고 연고 없는 노인들뿐이었는데, 인간으로서 순리대로 늙어갈 기본 권리와 사회적 효용 가치가 없어도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적 인권에 대해서, 노후 자금 없이 가난하게 홀로 병들고 아프게 늙어갈 일만 남은 노인들'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1년 동안 50편의 이야기를 선보였던 위픽 시리즈 시즌 1이 마무리되고, 곧 시즌2가 이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강화길, 임선우, 단요, 정보라, 김보영, 이미상, 김화진, 정이현, 임솔아 작가 등 라인업만 봐도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