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엄마는 깊이, 아주 깊이 심었다. 파내고, 끙끙대고, 들어올리고, 다져 넣었다. 마치 마음속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반복해서 되씹듯, 흙을 자꾸 뒤집었다. 엄마는 도저히 치유되지 않는 것들을 무디게 하기 위해, 세상과의 싸움을 멈추기 위해 흙을 사용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땅을 일구었고, 먹기 위해 심었으며, 수확한 것들을 작은 종이봉투에 담아 나에게 건넸다. 엄마는 익숙한 규범을 뒤집고, 일반적으로 예쁘다고 여겨지는 것을 거부하면서 내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이한 아름다움이 도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돌나물에도, 유포르비아에도,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서양향나무에도. p.207
가끔 그런 책을 만난다. 자아와 텍스트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나와 책 사이에서 마법같은 화학적 반응이 느껴지는 그런 책 말이다. 한 권의 책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누군가에게 말하는 한 방식이라면, 이 책은 분명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그저 홀린 듯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었다. 올해 읽었던 수많은 책들 중에 단연코 손에 꼽을 만큼 좋았던 책이다.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자란 저자는 DNA 검사를 통해 석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서로의 진정한 말벗이라고 생각해왔기에 그 결과는 큰 충격이었다. 이 책은 오래도록 숨겨져 있던 가족의 비밀, 과거와의 연결고리, 생물학적 기원과 뿌리를 찾으려는 긴 여정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집 앞 뜰을 정원으로 가꾸고, 보살피는 식물의 언어였다는 점이다. 저자의 어머니는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는 사람이었고, 오래 묵혀둔 가족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저자는 자신의 유전적 계보를 추적하며 어머니의 또다른 언어인 가드닝을 통해 천천히 부모의 삶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식물의 시간으로 상상한다는 건 우리가 이 세상에 없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엄마를 따라서 나도 정원의 언어를 구사해보려고 애쓴다... 엄마는 나에게 겉껍질, 뼈대, 겨울의 줄기로 말하는 법을 가르친다. 우리는 단풍나무의 마지막 다섯 잎을 휩쓸어가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땅을 덮은 진흙의 칙칙함으로 말하고, 영양분 가득한 부패의 냄새로 말한다. 우리는 또한 공기로 말한다. 퇴비로 가득 찬 공기, 젖은 쇠와 피 냄새가 배어 있는 공기로, 우리는 언어로 채 담지 못하는 것들을 만진다. 나는 잠시 믿게 된다. 정원의 분해 과정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 엄마의 쇠약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죽은 꽃들이 건네는 본질적인 조언을 듣는다. 그것이 아름다운 풍경이 꾸며낸 거짓이든, 눈송이가 얇게 쌓인 매혹적인 폐허의 기만이든 상관없다. p.338
이 책은 일본의 24절기를 단락의 제목으로 하고 있다. 덕분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지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부터 겨울을 마무리하는 대한까지 일 년 열두 달을 24절기로 나눈다. 봄비가 내리고 새싹이 돋아나는 우수, 본격적인 논농사 준비를 하는 청명, 보리 베고 모 심는 망종, 여름 더위와 장마의 시작 소서, 더위가 그치고 가을이 다가오는 처서,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한로, 겨울 첫눈이 내리는 소설, 겨울 중 가장 추운 때인 소한 등등 절기는 1년 동안 하늘을 지나가는 해의 발걸음을 스물네 걸음으로 나눈 것이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계절을 24개의 셋키(절기) 또는 계절의 마디들로 나누어 기록한다고 한다. 다이칸(대한), 슌분(춘분), 세메(청명)... 소코(상강), 릿토(입동), 토오지(동지)로 구분되어 있는 장들은 2019년 1월부터 시작해 2021년 9월까지의 시간들을 담고 있다.
원제인 ‘Unearthing(파헤치다)’은 땅을 파헤치고, 식물을 심고 돌보는 행위와 작가 자신의 유전적 위치를 확인하는 일, 가족의 새로운 연대기를 구성하는 작업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책은 백인 중심 사회에서 혼혈 여성으로 살아온 정체성, 부모 세대의 전쟁과 이주, 동화의 역사 등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종과 문화, 사랑의 경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사유한다. 식물을 엉뚱한 자리에 심으면, 정원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사정없이 일러주며,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며 통제하려 드는 강박을 비웃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종이와 잉크로 좁아진 나의 길을 벗어나는 우회로였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어머니는 저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랑하는 딸, 또 하나의 이야기를 줄게.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로 만들어졌지만, 우리가 잊은 것들로 이루어지기도 했단다.' 라고. 그러니 모든 점이 선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라는 걸, 모든 것이 무늬처럼 자일 수는 없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저자는 칼데콧 아너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림책 작가다. 국내에도 저자의 꽤 많은 그림책들이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많은 에세이, 논픽션을 써 주기를 고대하게 되었다. 이 책은 <여름은 고작 계절>의 김서해 작가가 번역을 맡았는데, 쿄 매클리어의 아름답고 사색적인 문장을 너무도 섬세하게 고스란히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모든 페이지를 옮겨 적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문장들로 가득한 이 눈부신 작품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