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이제 곧 사반세기이건만 지금까지 타인의 의견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인 적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그 때문에 걷지 않아도 됐을 가시밭길을 구태여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나. 좀 더 일찍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기대를 접었더라면 나의 대학 생활은 지금 같은 모양새가 아니었을 것이다. 히구치 스승님 같은 정체불명 괴인의 제자가 되지도 않고, 심지가 미로처럼 꾸불꾸불한 오즈라는 인물을 만나지도 않고, 이 년을 허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다. 가급적 신속하게 객관적 의견을 청해 응당 있을 수 있어야 하는 다른 인생으로 탈출하자. p.128
모리미 도미히코의 대표작 <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가 한국어판 출간 17년 만에 전면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기존에 나왔을 때는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라는 제목이었는데, 이번에 제목도 바뀌었고, 동명의 애니메이션 캐릭터 디자인으로 표지도 새롭게 꾸몄다. 문고본 출간 당시 작가가 직접 개고한 내용을 충실히 반영했으며, 번역자 권영주 또한 전체 원고를 새로 가다듬었으니 기존에 읽었더라도 다시 한번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모리미 도미히코 특유의 엉뚱하고 예측불허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매력인 이 시리즈는 초판 출간 이후 16 년 만에 속편이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다미 넉 장 반 크기의 자취방에 틀어박힌 '나'는 2년간의 대학 생활을 돌아보며 한탄한다.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 등 유익한 일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려 보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솜털이 보송보송했던 1학년 시절부터 다시 되돌아본다. 당시 신입생들을 모으느라 여기저기에서 전단을 붙이던 동아리 중에 흥미를 느꼈던 곳은 네 곳이었다. 영화 동아리 '계,. '제자 구함'이라는 기상천외한 전단, 소프트볼 동아리 '포그니', 그리고 비밀 기관 '복묘반점'이었다.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나에게 모두 대학 생활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 중에서 내가 선택했던 것은 영화 동아리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애초에 화근이었지 않나 싶은 것이다. 내가 만약 1학년 봄에 영화 동아리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면, 하나뿐인 친구이자 원수인 오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꿈같은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구가할 수 있었을까?

문을 연 나는 다다미 넉 장 반에 발을 들여놓았다. 기괴한 일이로다. 뒤를 돌아보았다. 혼돈한 나의 다다미 넉 장 반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반쯤 열린 문 너머에도 혼돈한 나의 다다미 넉 장 반이 있었다. 거울에 비친 방을 보는 것 같았다.... 문을 지나 내 방으로 돌아왔는데 그곳도 내 방이 틀림없었다. 오랜 수행을 통해 심담을 단련해 작은 일에는 동요하지 않게 된 나도 동요했다. 어찌 이런 괴현상이. 나의 다다미 넉 장 반이 둘로 늘었다. 문으로 나갈 수 없다면 창문을 여는 수밖에 없다... 나는 담배를 피우며 진정하려 해보았다. 대략 팔십 일간에 이르는 나의 다다미 넉 장 반 세계 탐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p.302
주인공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원수인 '오즈'는 공학부 전기전자공학과 소속인데도 전기도, 전자도, 공학도 싫어한다. 야채를 싫어하고 즉석식품만 먹어 안색이 달의 뒤편에서 온 사람 같이 심히 소름끼치고,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알랑거리고, 제멋대로고, 오만하고, 태만하고, 청개구리 같고 등등 칭찬할 점이 도무지 한 가지도 없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늘 붙어 다녔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오즈와 영화 동아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 나의 이야기가 첫 번째 <다다미 넉 장 반 사랑의 훼방꾼>이다. 이어지는 나머지 세 가지 이야기는 각각 다른 동아리를 선택한 나의 대학 생활 이야기이다. 비슷하게 시작해서 마치 평행우주를 구현한 듯, 같은 인물, 같은 장소, 같은 소품이 다른 방식으로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같은 하숙집을 배경으로 오즈와 그의 스승, 러브돌 가오리씨, 고양이로 국물을 낸다는 소문이 있는 포장마차의 고양이라면, 점쟁이 노파의 예언,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카스텔라, 나방이 출몰하는 사건까지 같은 소재로 빚어내는 조금 다른 서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네 가지 캠퍼스 라이프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장에 있으니 특히 주의깊게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우리는 가끔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선택에 대해 회한에 잠기곤 한다. 내가 그때 왼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갔더라면, 그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을 선택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의 내 삶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 작품은 황당무계하지만 유쾌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진지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가보지 않았을 미래에 대한 무해한 망상을 보여준다. 기발한 상상력과 입담으로 무장한 모리미 도미히코의 대표작을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