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해 보는 도전이나 시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후회나 두려움처럼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었다. 처음 해보는 것이지만 여러 번 해 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하고 싶다는 사춘기적 마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해야할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혼자 엉뚱한 짓을 해서 우스꽝스러워지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마음 같은 것. 때문에 뭔가를 한다는 건 정말이지 부담스러웠지만, 그럼에도 재인은 '한다'와 '하지 않는다' 사이에서는 '한다' 쪽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무조건 남는 게 있다고 믿는 편이었다. - 김화진, '근육의 모양' 중에서, p.80
재인은 다이어리에 꼭 해야 할 것들 혹은 해본 것 리스트를 적는다. 논술 학원 아르바이트, 원 나잇, 양다리, 전액 장학금, 절교, 독립 등 그리고 이제 그 리스트에 파혼과 필라테스, 담배가 기록되는 중이다. 서른두 살의 겨울,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남자친구와 이별했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일과 해치는 일을 동시에 해보기로 한다. 해가 갈수록 안 하던 뭔가를 한다는 게 어렵고 생각만으로 마음이 바빠졌으나, 그럼에도 언제나 '한다'와 '하지 않는다'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경우 재인은 '한다' 쪽을 선택하곤 했다. 무슨 일이든 무조건 남는 게 있다고 믿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은영은 대기업에 다니다 그만두고 필라테스 강사가 된 지 사년 차였다. 대기업 신입 사원 때 받던 월급을 사년 차 강사 때 받고 있었지만, 은영은 이 일을 좋아했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반쯤은 관상쟁이가 된다는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얼굴에 깃든 표정을 살펴보는 일은 좋아했다. 1회 체험 수업을 마치고 곧바로 등록한 재인의 얼굴에서 은영이 읽은 것은 기분이나 감정이 흐르지 않게 단단히 걸어 두려는 의지였다. 마음이 약해서 단단하게 걸어 잠그는, 그런 얼굴과 마주할 때마다 은영은 이상하게 마음이 기울곤 했다. 재인은 재인은 왠지 모르게 축났던 몸을 회복하기 위해 시작한 필라테스를 통해 자신을 상처 입힌 경험들마저도 잃은 것이 아니라 얻은 것이라는 발견을 하게 된다. 독립, 절교, 파혼, 끊어진 관계들의 기록들이 흉터가 아니라 근육이라고, 누가 날 해쳐서 남은 흔적이 아니라 내가 사용해서 남은 흔적이라고 말이다. 김화진의 <근육의 모양>은 아쉬웠던 경험조차 실패가 아니라 '해 본 것'이라고 이름 붙이며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의지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런 마음이라면 어떤 일이든 시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음은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 주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꼼짝도 못 하는 육체에 수감되는 형벌이라니. - 백수린, '흑설탕 캔디' 중에서, p.231
창비교육의 테마 소설 시리즈 열두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현직 교사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제자들을 걱정하며, 앞으로의 사회생활에 지표가 되어 줄 작품들을 선별해서 엮어 왔다. '우정'을 소재로 함께 걷는 소설, '가족'을 소재로 끌어 안는 소설, '노동'을 주제로 땀 흘리는 소설, '이별'을 주제로 손 흔 드는 소설 '재난'을 테마로 기억하는 소설, '환경'을 테마로 숨 쉬는 소설 등 다양한 작품들이 나왔었다. 이번에 나온 <시작하는 소설>은 '시작'을 테마로 한 7편의 단편 소설을 묶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서 발표가 되었던 소설들이라, 처음 만나는 작품도 있었지만 이미 읽었던 이야기들도 많았다. 하지만 분명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느 때 읽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또한 소설이다. 그래서 더욱 앤솔로지 형태로 묶인 테마 소설 시리즈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윤성희, 장류진, 조경란, 김화진, 정소현, 박형서, 백수린 작가가 그려내는 이야기들은 10대 청소년의 ‘성장’과 ‘우정의 시작’부터 20대의 ‘첫 출근’, 70대에 시작한 ‘사랑’까지 삶에서 마주할 법한 시작의 장면을 연령대별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시작'과 마주하게 된다. 학교에 입학할 때, 친한 친구가 생기고, 연애를 하고, 대입을 치르고, 직장에 입사하고, 결혼을 하는 등 누구나 사는 건 처음이기에 시작의 순간들을 겪게 된다.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고,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말이다. 꼭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큰 변화가 아니더라도, 소소하게 시도하는 모든 것들이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결코 쉽지 않고, 부담스럽기도,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시작들이 쌓여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이 책은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응원을 건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