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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나님의 서재
  • 그물을 거두는 시간
  • 이선영
  • 15,120원 (10%840)
  • 2024-11-27
  • : 145



시간이 흐르자 내 기억은 또렷해지는가 하면 흐릿해지는 부분도 생겨났다. 그렇게 강렬했던 무엇을 나는 고3의 힘든 상황으로 묻어버렸다. CF 장면처럼 잘 잡힌 구도의 자전거 모습은 두껍게 장막 쳐진 망각의 뒤안길로 완전히 묻은 채. 동시에 엉키고 꼬이던 내 생각도, 두 사람을 향한 질투의 감정도 완전히 잊었다. 교사에게 들은 희롱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과 함께.

민혁이라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나타나기 전까지 나에게 강수진은 '잊고자 하는 기억'이었던 건 아닐까?             p.72


이혼 후 고스트라이터로 일하는 윤지에게 어느 날 이모에게 연락이 온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성공했지만 가족들로부터 외면받으며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기록해두고 싶다는 이유였다. 윤지는 이모의 자서전 출간을 준비하며 가족들의 반대와 마주하게 된다. 이모의 아들 형서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지만 엄마를 초대할 생각이 없었고, 별거 후 다른 여자와 살고 있는 이모부 역시 괜히 분란을 만들지 말라고 말한다. 이모가 한평생 끌어안고 살았던 이야기는 뭘까. 


한편, 윤지에게 한 남자가 '강수진'을 기억하느냐고, 연락이 온다. 그는 30여 년 전 죽은 고등학교 동창생의 유품 정리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왜 이제와서 그녀의 물건을 정리한다는 것인지 의아하다. 수진은 교통사고로 죽었고, 나이가 너무 어려서 충격적이긴 했지만 교통사고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불운한 사고 중 하나였다. 윤지는 친구와 함께 수진의 장례식에도 갔었지만, 특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던 걸로 기억했다. 당시 동창 사이에서 수진의 사고에 대한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기에, 윤지는 의식적으로 그녀를 지워버리려고 했었다. 그런데 민혁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잊고 살았던' 과거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윤지가 애써 지워버려야 했던 과거는 무엇이었을까. 어긋난 기억의 조각을 되찾을 수록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기억이 주관적이라는 네 말이 맞다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걸 수도 있어.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이 와전된 걸 수도 있잖아."

"그건 진짜 아니야. 기억이 주관적인 것과는 별개로 진실은 변하지 않는 거잖아. 그래, 두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한 사람은 그런 마음이었을 거야. 사실 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 느끼던 일이었잖니. 우리가 아무리 어렸다지만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으니까. 단지 낯설었던 거야. 지금 같은 세상은 아니었으니까.              p.238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건을 경험했더라도 개인의 감정과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작용하는 것이 기억의 실체이다.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어제 본 듯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기억하는 것과 전혀 반대로 상대의 기억에 아로 새겨져 있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사람의 기억이란 너무도 주관적인 것이어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기억을 대조해보면 그 차이가 꽤나 크다는 점이 놀랍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작품 속 윤지는 마치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오랜 세월 자신의 감정과 선재와 수진이라는 동창에 대한 기억을 왜곡시키고, 망각해왔다. 그리고 잊고 싶었던 자신의 순수한 악의와 대면하게 된다. 이모 역시 자서전을 쓰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로 자신이 명백한 악의로 꽃다운 사람을 사지로 몰았던 과거를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자신을 평생 괴롭혀온 죄의식이었다고 말이다.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역사추리소설로 1억원 고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선영 작가의 신작이다. <지문>이라는 스릴러 작품으로 만났었는데, 가정폭력, 아동학대, 대학 내 성폭력 등 가정과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한가운데서 불합리한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인물들의 분투기를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 신작에서는 욕망과 집착, 그리고 희생과 용서라는 사랑의 양면성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누군가에게는 희생의 다른 이름이고, 누군가에겐 악의의 가면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 작품을 통해 망각의 장막 너머에 존재하는 여러 감정들을 만나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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