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내 욕구와 감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결함을 벌충하려면 근면하고 고상하며 눈에 거슬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어떤 성취를 거두거나 긍정적인 관심을 받을 때마다 내게 친숙하고 소중하며 나보다 많은 관심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너무나도 많은 친구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빈곤,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성차별로 고통받고 있다. 이 세상 어디를 돌아봐도 나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제들이 가득하다. 내가 아무리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고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려고 해도, 좀 더 다정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도 내가 갚을 수 있는 건 미미할 뿐이고 빚은 끝없이 쌓여가는 것만 같다. p.17~18
장애인은 자신의 장애를 남들에게 뒤처지는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되며,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열심히 일해야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여성은 직장 내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흑인은 말투를 절제함으로써 업계에서의 인종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전부 사회가 떠넘긴 체제적 수치심(Systemic Shame)이다. 그에 따르면 세계적 팬데믹은 기업의 잔혹함과 정부의 태만이 아니라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대규모 총기 난사는 백인 우월주의자나 기타 혐오자의 행동이 아니라 사악하고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들이 생각 없이 저지르는 짓이다.
이 책은 이러한 체제적 수치심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지나친 노력과 자기계발을 그만두고, 사회가 개인에게 떠넘긴 책임들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것들로 자기 혐오와 수치심,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이제는 사회가 권하는 수치심을 튕겨내고 내 안의 회복탄력성을 길러야 할 때인 것이다. 소수자이자 사회심리학자로서 저자는 우리를 실패자로 만드는 감정들, 즉 수치심과 자기혐오, 자기비판을 내려놓고 진짜 잘못한 것들에 눈 돌리라고 말한다. '체제적 수치심'은 내가 처한 상황은 전부 내 탓이며 이런 상황을 극복할 방법은 나의 선행과 노력뿐이라는 강력한 자기혐오성 신념을 말한다. 교통사고부터 각종 전쟁, 흡연, 질병, 백신 접종과 기후위기까지 사회는 '체제적 수치심'을 자극해 개인에게 문제를 떠넘겨왔다. 이제 우리가 그러한 체제적 수치심에 맞서 싸워야 할 때인 것이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체제적 수치심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체제적 수치심은 우리가 영원히 성취할 수 없고 인정받지 못할 일에 매달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며, 남들을 평가하고 비난할 뿐 아니라 자신을 책망하게 한다. 우리는 이런 가치 체계에 의문을 던질 때 비로소 자격을 인정받는다는 것 자체가 허구임을 깨닫는다. 사랑받을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수용은 이미 우리 주변에서 우리에게 발견되기만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지금의 엉망진창인 모습 그대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p.366~367
'수치심(shame)'이라는 단어는 '가리다, 숨기다'를 뜻하는 원시 인도 유럽어 어근 스켑(skem)에서 나왔다. 수치심이란 자신을 주변 사회로부터 분리하고 숨기는 것이다. 외면하거나, 숨거나, 남들과 거리를 두는 모습으로 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수치심은 항상 개인의 사회적 위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아이나 노예, 하층 계급 또는 카스트에 속하는 사람은 수치심을 느끼는 집단으로 묘사될 가능성이 성인이나 자유인보다 높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사회적 낙인과 수치심은 항상 연결되어왔다. 범죄자를 영원히 알아볼 수 있도록 그의 피부에 새기는 표식을 의미하는 낙인찍기는 누군가를 규칙 위반자이자 수치심을 느껴야 마땅한 사람으로 표시하는 물리적 행위였다. 인간에게 수치심이 필요하다는 믿음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지만, 기독교가 생겨나고 농업과 산업의 발달로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이 책은 이렇게 역사와 사회학, 심리학을 넘나들며 차근차근 수치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라이스는 우리가 최선의 선택을 했음에도 자꾸만 노력이 부족했다며 자책하고 심리적으로 고통받는 이유에 대해 연구했다. 그리고 이 사회가 ‘체제적 수치심’이라는 프레임으로 움직이고 있다는데서 그에 대한 답을 찾는다. 모두가 수치심에 휘둘리는 사이, 빈곤을 낳는 사회적 구조,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막는 유리천장, 기업들이 끼치는 막대한 환경 피해와 대중을 속이는 그린워싱 등 사회와 정부, 기업들의 책임은 어느새 밀려난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할 것은 현실을 기꺼이 직면하고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자문해보는 것이다. 수많은 시도 끝에 ‘해도 안 된다’는 자괴감과, 자신이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수치심, 노력해도 남보다 못하다는 열패감, 급기야 사회적 모순마저 개인의 탓이 되어 버린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이었다. 기후변화, 소득 불평등, 사회적 인종차별, 트랜스젠더 혐오 폭력, 세계적 팬데믹 앞에서 더 이상 무기력해지거나 낙담하지 말자.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함께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어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