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치카』에 대해서는 지난 번 페이퍼를 한 번 쓰기도 했지만, 참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러시아 판 『여자의 일생』이라 생각하여 모파상의 작품과 비교하게 되면서도 그 대지에 대한 나의 편견이 발휘되는 것이다. 『전쟁과 평화』를 비롯한 러시아 작품들을 이야기 할 때 늘 반복하는 이미지가 있다. 넓은 시베리아 평원에 눈 나리는 소리, 그 고요한 자연의 호흡... 사실 이 표현은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안드레이 마킨이 한 말을 조금 빌려 쓰고 있다.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어쩌면 필연적으로 익히게 되는 포용력, 아니 넓은 스펙트럼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까. 러시아인에 대한 이미지... 인간 본연의 순수와 정신적 합일을 추구하는 시를 향유하다가도 하드코어한 인터코스, 어떤 육체적 행위에도 거리낌이 없는 그런 극단성. 이쯤은 별 것 아니라는 듯 껴안을 수 있는 그런 모습을 이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작품에서 그런 장면들이 묘사되는 것은 아니고... 어떤 도덕적인 범주를 훌쩍 넘는 배신과 포용의 과정을 보았다. 마땅히 지켜져야 할 도덕적 규범을 어기는 것을 패륜이라 한다면, 그것들을 보았다는 것이다. 표제작 「소네치카」의 주인공 소냐가 의붓딸로 여기고 사랑한 아샤가 소냐의 남편 로베르트 빅토로비치의 애인이 되는 것. 소냐의 딸 타냐가 아샤를 연민하고 사랑하여 그녀를 부모에게 소개하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는 복잡해진다. 「메데야의 아이들」의 주인공 메데야와 그녀의 남편. 메데야와 대척점에 선 동생, 알렉산드라가 낳은 아이들 중 한 명의 아버지는 메데야에게 깊은 고통을 안긴다. 메데야는 자신을 잉태하지 못하는 몸이라 여겨 조카들을 더욱 챙기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조카들 중 마샤와 니카의 관계 역시 배신에 바탕한 사랑, 그 위선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고통과 상처를 안긴 이들은 어떤 처벌 없이 행복하게 잘 산다는 것이다.
로베르트 빅토로비치는 말년에 얻은 뮤즈로 인해 왕성한 예술 활동을 하다 복상사로 죽는다. 소냐의 주선으로 아샤는 잃어버린 가족도 찾고, 젊은데다 부자인 프랑스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파리에 가 산다. 알렉산드라는 방황을 마치고 부족하나 그녀를 귀히 여기는 남성에게 정착했으며, 니카 역시 부자에 너그러운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잘 먹고 잘 산다. 니카와 마샤의 사이를 드나들던 부토노프는 여전히 잡음없이 아내와 가정 생활을 영위한다. 그렇다면 이 고통을 감내하는 인물들은 어떤가... 소냐는 남편을 내어주고 그들의 추문을 가리기 위해 앞장서며, 메데야는 고통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내색하지 않는다. 마샤의 경우는 이를 견뎌내지 못하는데 이는 어린 시절의 영향과 마샤 특유의 예술가적 기질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삶을 이어간다. 인내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마지막 단편 「스페이드의 여왕」의 주인공들에서도 드러난다. 강력한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딸과 그 딸의 이야기, 그 인고의 세월...
여성들이 이끄는 이야기 속에서, 강력하 여성들의 힘은 서로 반목하지 않는다. 배신은 상처와 아픔을 남기나, 그를 받아들이는 캐릭터들의 어떤 숭고함 때문에 용서는 더욱 위대해진다. 금기를 뛰어넘는 관계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단순함. 이런 단순성에 의해 움직이는 삶은 기쁨을 가져오는데, 그 기쁨이 다른 이의 관대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포용하는 대지, 마더 러시아를 떠올리게 한다. 그 안에서 캐릭터들은 힘을 잃지 않는다. 여성적 목소리로 가득 찬 신화... 역사의 부침 속, 그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 선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반복되고 이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느낌. 어떤 이는 한없이 자애롭고 어떤 이는 한없이 자유분방하고. 극과 극을 오가기에 오히려 균형이 맞는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러시아 고전, 그리스 신화, 동명의 푸시킨 소설을 다시 쓰기 하며 위대한 러시아 고전을 현대성 속에서 되살린 울리츠카야. 한 번 읽어볼만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