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고 꽁꽁 숨겨 놓고 도망가는 것, 그것은 16살 그녀의 발바닥에 박힌 쇠스랑처럼 어쩌면 예감된 삶의 독한 상처들일지 모르겠다. 작가는 오랜시간이 지났어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질기도록 따라가고 파헤쳐 기어이 벌겋게 드러내 보인다 . 도망가버린 곳에서 돌아와 생생하게 현재화시킨 과거를, 그 과거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현재를 오가며 작가는 묻는 사실과 픽션, 문학과 문학밖을 드나드는 이소설을 문학이라 할 수 있을지, 그런 글쓰기의 의미를...... 작가는 그런 가려진 삶의 진실을 소설을 통해 밝히고 난 후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그 다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내내 고민해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야기는 70년대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골에서 큰 오빠가 있는 서울로 상경해 주간에는 공장을 야간에는 학교를 다니게 되는 외사촌과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소설은 시대상과 산업화된 도시생활, 그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풍속화"처럼 그리고 있다.
기계화되고 삭막해진 도시에서 궁핍함과 상처로 그 시대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던 구로 공단의 산업체 특별 학급의 그녀들 이갸기, 그 속에서 작가는 여러가지 에피소드, 노조탄압 ,광주학살, 삼청교육대에 희생된 사람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시대의 폐해와 부조리를 고발한다. 그러면서 그녀의 "영원히 과거가 될수 없는 상처"인 희재 언니를 힘겹게 꺼내놓는데 '나'와 희재언니의 꿈과 사랑, 그리고 절망을 보다 의도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가 동참해버린 그녀의 죽음에 이르러서 우리는 결코 남이 될 수 없는, 그래서 고스란히 그 가슴아린 죽음을 주인공과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버팀목처럼 서있는 큰 오빠, 동생들을 위해 엄격하고 헌신하고 고생하지만 정작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또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을까. 지지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강한 부성마저 느껴지는 큰 오빠와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저항에 항상 눈떠 있으려는 셋째 오빠 . 특별학급의 그녀들과의 관계 힘든 삶속에서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며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는 관계... 작가의 최근 인터뷰에서도 "인간은 누군가 돌봐주지 않으면 태어날 수도 성장할 수도 생활할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존재 아닌가" 라고 했듯 관계와 소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작가의 글은 인간적이고 따뜻하며 아름답다.
이제 책을 덮는 이 시점에서 나는 정성이 가득 들어간 정겨운 고향의 음식 냄새를 맡는다. 언 가슴이 훈훈하게 하는 익숙하고 반가운 냄새다. 책의 곳곳에서는 주인공이 지치고 공허함에, 슬픔에 빠졌을 때, 불쑥 불쑥 나타나 토속적이고 맛깔난 음식을 해먹이는 엄마가 있다. 많이 먹어라 더먹고 힘내라고 하며, 기운을 복돋아주고 아픈곳을 보듬어주고 빈 곳을 채워주는 엄마표 음식, 든든하게 속을 채워준 그음식을 먹고 나면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상처를 딛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걸... 그 어머니를 닮은 모성이 가득 베인 신경숙 작가의 글은 구원처럼 힘든 이들을 구해주는 강한 힘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