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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밖의 위험한 세상...
  •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로버트 뱅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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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19
  • : 11,983

서평 :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로버트 뱅크스 저, 신현기 옮김, IVP.

 

 

 

1. 초대교회를 향한 그리움

 

필자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며 가장 자주 접해 본 캐치프레이즈 중 하나는 아마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구호일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필자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초대교회라는 단어에는 듣기만 해도 뭇 성도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매력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마력’적인 아련함과 희구가,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지요.

 

어떤 이들은 초대교회를 생각할 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의 초자연적인 임재와 그 직후 이어진 폭발적인 방언 현상을 함께 떠올립니다. 반면 누군가는 초대교회라는 이름에 배어있는 피와 눈물의 무게를 상기하곤 몸서리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초대교회’의 이미지란, 행각에 서서 수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용맹하게 설교하는 베드로라든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장면처럼,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이겠지요. 우리는 바로 그 ‘능력충만’했던 선배들을, 찬란했던 교회의 과거를 그리워했기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쳐온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의 길’을 걷는 것이 곧 닥쳐올 모든 불이익을 기쁘게 감당하기로 결단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녔던 시대의 교회, 믿음을 가진다는 말이 핍박과 내어쫓김에 자신을 수시로 노출시킨다는 뜻과 동의어로 기능했던 시대의 교회, 제국에 의해 반동분자요 불신자로 찍혔던 교회... 우리가 속히 돌아가야 한다고 핏대 높이는 ‘그 초대교회’는 사실 그런 교회였습니다. 현대 교인들이 사모해 마지않는 경이로운 가시적 현상들과 능력 이면에는 제물로 바쳐진 신실한 이들의 눈물과 피와 죽음이 존재했던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예배당 외벽에 내걸려 있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현수막들에는 과연 그에 합당한 무게가 실려 있는 걸까요? 혹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호기로운 외침 속에, “초대(형)교회로 돌아가자!”는 은밀한 욕망을 숨겨놓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2. 푸블리우스의 잊지 못할 경험

 

본서는 ‘푸블리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초기 그리스도교 태동기를 살아가던 한 가상의 인물이 체험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기술한 책입니다. 저자인 로버트 뱅크스는 이 평범한 허구의 인물을 통해 1세기 중엽 로마의 생활상을 면밀하게 묘사하는 한편, 신약성서 특히 서신서들을 신자의 행동규범 정도로만 취급한 결과 우리가 놓쳐온 당대의 교회가 지닌 활력과 급진적인 역동성을 탁월하게 복원시켜 독자들에게 내놓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 가장 와 닿는 이 책의 탁월함은 바로 저자가 1세기 교회의 예배를 묘사하는 데 사용한 방법이 ‘이야기’, 그것도 1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전개한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입니다. 저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의 시각이 아니라 동시대 일반적인 로마인의 눈으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를 관찰하고, 그들의 모임에 초대받은 비신자라면 응당 느꼈을 법한 당혹감과 생소함을 사실적으로 표현합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푸블리우스가 사회성이 결여되었거나 지적으로 불성실하거나 혹은 통찰력이 빈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독자들에게는 다행히도 본서의 화자는 딴 생각을 하다가 중요한 장면을 놓치거나 모임에 참여한 이들 중 끌리는 이성에게만 시선을 던진다거나 하지 않고, 적절한 반응과 관찰력을 가지고 자신이 참여한 예배를 보고 느낍니다. 덕분에 우리는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며 딱딱하고 경직된 권위주의적 종교 행사가 아닌, 따스하고 온정적이며 무엇보다 자유로운 그리스도교의 예배를 맛볼 수 있지요. 그것은 사회적 계층 사이에 존재하던 심리적 장벽이나 성차별적 담론의 견고함, 마치 태초부터 이어져 온 것 같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감 등이 그 기능을 몽땅 잃어버리고 복음 안에서 진정한 화평과 안식으로 회복되어져 가는, 야성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3. Ad Fontes!

 

올해(2017년)로 종교개혁이 500주년을 맞이했다고 개신교계가 떠들썩합니다. 그런데 필자는 사실 ‘종교개혁’이라는 단어에서 어떤 위화감과 불편함을 느끼곤 합니다. 500년 전에 일어난 개혁은 수많은 종교들 중에 하나인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일이었고 그나마 주류 교회였던 로마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분리되어 나온 사건에 지나지 않은, 동방 정교회나 콥트교회 등은 그다지 관계조차 없었던 일이니까요. 따지고 보면 그리스도교 안에서조차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개혁은 아니었던 셈이지요. 물론 그리스도교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이들의 희생과 노력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 칼뱅 등의 개혁의 거두들과 여러 위대한 신앙고백서들을 남겨준 개혁자 선배들의 노고로 인해 오늘날 필자와 같은 무지한 개신교인들이 그나마 길을 잃어버리지 않고 믿음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Ad Fontes”, 본질로 돌아가자는 짧은 문장은 당대 가톨릭 성직자들의 나태함과 신학적 타락을 고발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속고 이용당해온 신자들에게는 경종을 울려주는 강력한 외침이었습니다. 간결하고도 핵심적인 이 외침이 수없이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오게 했고, 그들을 율법과 죽은 조문의 종교로부터 해방시켰으며, 스스럼없이 순교의 자리에 서도록 만들었습니다.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개혁의 주체에서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작금의 개신교회들에서 다시 한 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쳐져야 할 구호 역시 “본질로 돌아가자!”는 문장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많은 이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초대교회’, 거기서부터 우리가 되찾아야 할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개혁교회의 전통에 서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것을 ‘말씀’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지당한 말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어져 온 ‘급진성’, 특별히 기존의 종교적 권위주의(장로들의 유전 같은)를 가열하게 파괴하고 기득권자들을 위한 위계적 질서를 남김없이 해체하는 그 저항적인 면면에서, 또 하나의 그리스도교만의 ‘본질’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본서가 묘사하는 1세기 교회의 예배 전경에 바로 그 급진성이, 어느덧 우리가 상실해버린 그 ‘본질’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4.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모든 종교들은 각자의 교의가 실현되는 장인 동시에 신앙행위의 핵심에 해당하는 예배(혹은 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배'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일상의 영역과는 구분된, '거룩한' 시간과 장소에서 드려지기 마련입니다. 만약 가정생활이나 노동과 같이 인간 자신을 위해 소비되는 영역을 '일상'이라 정의한다면, 예배란 정해진 시간과 장소(특별히 성전 혹은 신전)에서 신에게 (제물과 함께) 바쳐지는 '구별된' 영역인 셈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종교란 불완전한 인간 존재가 삶의 윤택함과 이생의 안정, 내세의 안식을 누리기 위해 쏟는 투자이며, 세속을 악하고 지저분한 곳으로 인식하는 자들에게는 죄책감과 불안으로부터 심리적 구원을 보장해주는 탈출구인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미적 강박의 걸작이라 할 만한 건축물 속으로 도피한 다음, 그곳에서 스스로를 정결케 하는 시간을 보냈노라는 달콤한 착각에 빠집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작동하는 매커니즘이 이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원리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본서가 묘사하는 교회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러한 보편적 종교의 껍데기를 벗어납니다. 예수라는 한 평범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은 사랑의 정신이 결여된 모든 종교적 틀과 규례들의 무의미함을 고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베드로와 요한 앞에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자'를 보이셨고, 그를 치유하게 하셨고, 그가 성전 문턱을 넘어서는 모습을 목도하게 하셨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예수께서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파괴하셨음을 상기했고 이제 그 성전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바로 주의 영이 임하시는 그들 자신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에는 '구별된' 시간이나 장소가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주로 '가정'에서, 밥 먹고 부부싸움하고 똥 싸는 바로 그곳에서 모여 주를 예배했습니다. 본서가 잘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이 작동하는 곳에서 '예배'를 드렸고,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빵과 포도주'로 주님의 성찬을 시행했습니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예배, '일상의 예배'가 그리스도교의 예배인 것이지요. 푸블리우스가 독백한 것처럼, 아마 타 종교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어쩌면 독자들 가운데에도, 정형화된 예배 의식과 정해진 시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분들은 이 책의 내용이 다소 불편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서 드려진 예배가 기독교 해체주의의 이상적 경관이라거나, 오늘날 우리의 정형화된 예배는 완전히 잘못된 오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교의 전통에 익숙해있던 푸블리우스가 느꼈던 당혹감과 같이, 마치 형식이 있는 듯 없는 듯하고 때론 전혀 ‘예배스럽지 않은’ 자유함을 21세기의 한국 개신교 신자들이 과연 누리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배의 엄숙함을 위해 아이들을 모자실로 내쫓고 공동체의 구획을 나누는 와중에 일상과 예배를 구분해놓고 성(聖)과 속(俗)의 우열을 가리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로부터 일상을 밀어 내쫓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그러나 저는 일상과 예배의 일원화(一元化)가 주는 파격이야말로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교의적 핵심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피적 구별로서의 '거룩'이 아닌 일상 속의 거룩함, 삶의 시공간이 동시에 예배의 시공간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일상의 영성, 삶 속의 자연스러운 거룩함을 갖도록 끊임없이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며, 그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의 폭발적인 능력의 원천이 되어줬을 테니까요.

 

1세기 로마인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와 일상이 상호 유리(遊離)되지 않은, 삶이 예배고 예배가 곧 삶인 존재였습니다. 밥 먹고 잠자는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당시 흔해 빠진 음식과 음료였던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 것이 그들 예배의 절정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천상의 보좌를 떠나 '사람이 되신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어, 그가 종교의식을 위한 단 하루가 아니라 모든 나날들의 주인이 되셨고 나아가 모든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 되셨다는 결론에 합당한 모습이지요. 오늘날 우리 모습은 다시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집착하는, 위선적 종교인으로 퇴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종교개혁 500주년, “Ad Fontes!”를 외치고 있으면서도 교회는 어쩌면 돌아가야 할 그곳과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우리는 과연 바르게 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신자라면 본서를 통해 푸블리우스와 함께 1세기 교회의 예배에 참석해서, 우리가 잃어버린 그 ‘본질’을 다시 한 번 체험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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