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에게 교양이란 것이 너무 어렵고 난해해서 멀게만 느껴진다면 문제다. 그래서 이런 책이 나온 것 같다. 저자는 넓고 얕은 지식이 지적 대화를 위한 기본 전제라고 하는데 그 말이 성립하려면 그 넓고 얕은 지식이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 오해의 시작은 같은 사태(사물)에 대한 다른 해석(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정확한 지식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 정확한 것은 둘일 수 없으며 그래서 근대 철학에서 추구한 진리란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이 일치하는 것' 즉, 인식론적 진리였다.
이 책이 다루는 지식이 정확한 지식인가 하는 우려는 48p에서 벌써 현실화되는데 저자는 중세 봉건사회를 설명하면서 "국왕과 노예 사이에 성직자, 영주, 귀족, 기사, 농노, 노예가 생긴다."라면서 친절하게 피라미드 그림까지 곁들여 주었다. 그러나 성직자가 국왕 아래 위치하는 건 절대왕정 시대에 가서 발생한 현상이고 중세 시대엔 국왕은 성직자(교황)의 통제 아래 있었다. 그 일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카놋사의 굴욕'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유럽이나 중국, 일본에 성이 있는 것은 그들이 중세를 거쳤기 때문이다. 반면 영주들에 의해 지방으로 권력이 분산되지 않고 국왕 중심의 집권적 체제를 유지했던 한반도에는 거대한 성이 없다.(50p)"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고구려성의 평균 높이는 10m였다고 한다. 웬만한 중국의 성에 뒤지지 않는 규모다. 다만 이후 성벽이 자연적으로 무너져 내려도 문치주의 강화에 의해 무너진 높이에서 더 높이 쌓지 않고 방치하거나 그대로 보수를 하면서 오늘날 거대한 성이 남아있지 않았을 뿐이다. 저자가 전문가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하지 말라. 전문가가 아니어서 부정확한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저런 확정적인 표현으로 대중을 호도해선 안 되었다.
"부르주아는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대체했다.(55p)"
"왕이 죽는 순간인 동시에 신이 죽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중세가 끝나는 순간이었다.(58p)"
참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부르주아는 무신론자인가? 그냥 문학적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까? 신의 역할을 대체했다는 건 관대하게 봐주겠는데 '완벽하게'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데카르트도 인간 이성은 신이 부여한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을 저자도 알고는 있겠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가 1900년에 죽었는데 중세가 19세기 말에 끝난 건가. 중세의 종말인 14세기와 이성의 시대인 19세기가 묘하게 버무려진 정체불명의 비빔밥이 연상된다. 뭘 그런 걸 문제삼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부정확하고 모호한 넓고 얕은 지식으로는 지적 대화를 할 수가 없다.
더구나 158p의 마르크스의 변증법에 대한 설명은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관한 설명이다. 역사적 유물론이란 하부구조에 해당하는 경제체제가 왕-노예, 영주-농노, 부르즈아-프롤레탈리아와 같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역사적 유물론'의 도식에다가 떡 하니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줄여서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진리(사물과 그 사물에 대한 관념이 일치하는 상태)를 얻기 위해 사람은 사물과 실천적으로 상호작용하고 관념을 실천에 알맞게 형성함으로써만 그 사물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념과 실재의 일치 즉 진리를 검증하는 기준은 사회적 실천뿐이라고 한다. 왕-노예, 영주-농노.....등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저자의 가장 큰 오류는 진보-보수의 구분을 좌파-우파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일단 아래 본문의 문장들을 살펴보자.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을 '진보' 혹은 '좌파'라고 한다..................오늘날 일반적으로 진보라 할 때 그것이 지칭하는 것은 후기 자본주의나 사회민주주의다. 하지만 이렇게 후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동시에 진보로 분류된다는 언어적 문제는 한국 근현대의 비극을 만들어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의 후기 자본주의자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공산주의자나 빨갱이로 불리기도 한 것이다."(198~199p)
이 부분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나 빨갱이가 아니라는 취지이지만 어쨌든 이들은 저자의 분류에 의하면 '진보'혹은 '좌파'다. 그런데 208p에 가면 도표에서 민주당은 떡하니 보수에 배치되어 있다. 대통령은 '진보'인데 그가 몸담은 정당은 '보수'인가?
우파와 좌파의 구분은 1792년 프랑스 민중이 왕궁을 습격해 루이 16세와 왕비를 죽이고 국민공회를 수립하는데 이때 의회당의 좌측엔 자코뱅파가, 우측엔 지롱드파가 앉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지롱드파는 부유한 부르주아를 대변하여 자유주의, 지방분권주의를 주장했고 자코뱅파는 소시민과 민중을 대변하여 강력한 중앙집권과 통제경제 및 복지강화를 주장했다.
반면 진보와 보수는 현재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을 '진보', 현재 체제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여 근본적 변화를 거부하고 점진적 변화를 꾀하는 것을 '보수'라고 한다. 이런 내용을 저자도 알고 있는지 책 여기저기에서 잘 서술해 놓았는데 정작 그 개념을 정확히 사용하지 못하고 '진보'를 '우파'와 같은 것으로, '보수'를 '좌파'와 같은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한국사회에서 진보는 일제시대를 거치며 한국 지배층에 문제가 생겼으므로 이를 근본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역사주의적 시각을 보이며, 보수는 일제시대는 근대화 과정의 소중한 시기였으므로 일제시대의 성과를 이어받은 한국의 정체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역사주의적 시각을 보인다. 이들이 뉴라이트다. 이것은 부르주아 중심의 자유주의 성장 중심 경제정책을 펼지, 복지를 중시하는 분배 중심 경제정책을 펼지에 따라 갈리는 우파, 좌파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둘을 헛갈리면 지적 대화를 할 수가 없다.
저자는 238p에서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실제와 미세한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실제 사회는 예상치 못한 외부적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라고 썼지만 내가 보기에 저자의 가장 큰 문제는 개념을 정확히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과 개념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이다. 엄연히 별개인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과 유물론적 변증법을 혼동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특히 300p에서 A도시를 구하기 위해서 B도시를 희생시키는 상황과 열 명의 병자를 살리기 위해 건강한 Z씨를 희생시키는 사례를 제시하며 "(3) 두 사례가 논리적으로 동일한 구조가 아니라는 근거제시"라고 써놓고 "이 중 (3)은 불가능해 보인다."라고 했는데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의아했다. 저자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점에서 두 사례가 같다고 강변하는데 어떻게 국가의 공적 결정과 개인의 사적 결정이 똑같을 수 있는가. A도시와 B도시를 선택해야 하는 대통령은 국가의 공적 기관으로서 수많은 변수를 고민해야 하는 입장이고 Z씨를 죽여 그 장기로 살려는 열 명의 병자는 결국 자기가 살려고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닌가. 그 숫자가 열 명이니까 전체가 된다는 논리인가? 그런 개같은 소리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부분이 많이 있지만 책을 후루룩 넘기며 눈에 띄는 곳만 적어 보았다. 이 책이 아주 나쁜 책이라거나 쓰레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읽지 않으면 이런 아이템을 생각해 냈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저자가 6p에서 말했듯이 지적 대화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이란 내가 발 딛고 사는 '세계'에 대한 이해다. 그러나 그 이해는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리뷰 시작부에 썼듯이 대부분 오해의 시작은 같은 사태(사물)에 대한 다른 해석(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정확함'이란 '정확한 개념'을 사용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개념을 정확히 사용하지 않는 사례가 이렇게 많이 나왔다면 그건 저자가 자신의 말을 배신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너무나 명백한 오류와 엉터리 내용에도 이를 지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 "좋아요", "재미있어요"라고 하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교양 수준이 얼마나 바닥을 치고 있는가 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