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씨는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일본 바라보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 객관이란 한국과 일본이 모두 사실로써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주장에 대해선 나 역시 깊이 공감한다. 그러나 이 책이 과연 한국과 일본이 모두 사실로써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명백한 사실을 밝히고 있는지에 대해선 지극히 부정적이다. 짧은 리뷰를 통해 몇가지 박유하씨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치명적 오류가 존재함을 밝히고 싶다.
일본만이 사악하고 악랄한 나라였다고 말한다면 편파적일 것이다. 한국 역시 베트남에서 "한국인도 악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열렬히 증명한 바 있으니까. 그러나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한일 관계에 끌어대어 "그러니 우리는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에두르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오류다. 마치 2005년 중국에서 남경대학살을 비난하며 격렬한 반일시위가 일어났을 때 일본인들이 "중국인도 티벳인을 학살했다"며 "중국인은 일본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오류다. 쉽게 말하면 중국인이 티벳인을 학살했다고 해서, 한국인이 베트남인을 학살했다고 해서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무게가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아니, 일본의 전쟁범죄를 논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경우를 끌어대는 것 자체가 논점 일탈의 오류에 불과할 뿐이다.
박유하씨는 우리 내부에도 가해자의 모습이 존재한다며 일본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부터 반성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논리적 파탄이다. 이 문제의 쟁점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범죄에 관한 것이지, 조선인과 일본인이 등장하는 '민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안부를 모집하고 수송한 실무자 가운데 조선인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가해자인가? 여기에서 우리란 누구인가.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박유하씨가 언급한 '조선인'이란 사실은 '일본인'이다. 박유하씨는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한 민족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자고 끊임없이 외치면서도(그녀의 다른 저서 '반일민족주의를 넘어서'를 참조) 사실은 일본에 세금을 내고 일본 국적을 갖고 스스로 일본인이라고 믿고 있던 일본인 가운데 특정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임의로 '조선인'이라는 이름으로 떼어내어 '우리'와 동일시해버린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논리적 근거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인데 그녀는 이미 '민족' 개념 자체를 부정했으므로 결국 논리적 파탄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착각은 이 책의 곳곳에 녹아 있어서 여간해선 구별해내기조차 쉽지 않다. 박유하씨 자신이 "식민지 젊은이로 하여금 군대에 지원하여 일등 시민이 되기를 열망하게 만든 일본이라는 국가 체제의 폭력성"에 대해 비판한다고 말하면서도 위안부 문제에선 슬그머니 민족이라는 틀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정작 "일본이라는 국가 체제의 폭력성"을 은폐해 버렸다. 박유하씨 자신도 이것이 "국가"의 문제인지 "민족"의 문제인지 혼동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만일 혼동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라면 이보다 비열하고 악질인 경우는 없을 것이다)
나는 위안부 문제를 논의할 때, 일본인과 한국인의 민족적 대립으로 귀결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가해자 일본인과 피해자 한국인이라는 도식은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일본이라는 국가의 무자비한 폭력을 드러내어 일본이라는 국가로 하여금 철저한 반성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나라도 일본의 반성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해자 가운데에는 '조선인(엄밀히 말하면 조선지역 출신자)'도 있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건 오히려 가해자 일본인과 피해자 조선인(한국인)이라는 도식을 조장하여 오히려 진실을 은폐하는 논리다. 문제의 본질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폭력성에 있는데 박유하씨는 여전히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민족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민족을 지워버리면 그 가해자 '조선인'도 사실은 일본인이다. 결국 일본이라는 국가의 폭력성이 쟁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국가가 그 폭력의 피해자에게(한국 정부에게 말고) 한번도 공식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의 분노를 촉발하게 된다.
그런데 박유하씨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이라며 집요하게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정대협 관계자들을 공명심에 사로잡힌 협잡꾼이라고 몰아부친다.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그러하니 설사 일본인 가운데 침략을 부정하고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로 매도하는 무리가 있다고 해도 우리는 문제 제기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처구니 없게도 갑자기 박유하 씨는 위안부 기금에 성금을 보내온 일본인들의 편지를 소개하기 시작한다. 일본 정부 차원에서가 아니라 일본 시민사회 차원에서라도 이렇게 위안부 피해자에게 성금을 보내고 있으니 만족하라는 것인가?
'침략은 없었다'는 일부 일본시민단체의 발언 보다 '침략을 반성한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저자는 겨우 몇 페이지 뒤에선 위안부에 사과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오만한 태도 대신에 일부 일본시민들의 자발적 성금 모금 움직임에 주목하라며 감동을 받을 것을 독자에게 강요한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어떤 부분은 정부의 공식 입장이 중요하고, 어떤 부분은 시민들의 움직임이 중요해지는가? 별로 두껍지도 않은 책 한 권 안에서 도무지 원칙도 일관성도 찾을 수가 없다.
이외에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등에서 저자는 무지에서 비롯된 허투른 비판을 하고 있는데 하나 하나 지적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지닌 역사적 가치와 의의를 지적하는 그녀는 정작 조선총독부 때문에 훼손되고 망가진 경복궁의 역사적 가치외 의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다른 곳에 지어도 되었을 총독부 건물을 굳이 궁궐을 파괴하며 그 복판에 지은 그 악랄한 일제의 의도성이라는 걸 박유하씨 자신만 모르는 것일까?
어떤 부분에선 배울 점도 있는 책이었지만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이러한 치명적인 논리적 파탄 때문에 마지막 장을 덮을 땐 이런 사람이 대학 교수를 하고 있구나 싶어 한숨만 나왔다는 것을 고백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