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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하르트 리히터
- 디트마어 엘거
- 31,500원 (10%↓
1,750) - 2024-12-15
: 1,250
#게르하르트리히터#영원한불확실성#디트마어엘거#이덕임옮김#을유문화사
리히터의 회고전을 보며 여러 작가의 합동전 같다고 느꼈다. 그런데 그 작가들이 모두 흥미롭다고.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은 그것이 단지 시기에 따른 이행이 아니라 그런 상이한 작품을 동시에 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토록 여러 스타일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장인적 스킬 덕분인데 동독의 미술학교에서 기본기를 탄탄히 닦았다고 한다.
책은 꽤 세세하게 그의 예술가로서 생애를 다룬다. 성장기.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탈출(이주), 어울린 예술가들, 당대의 다른 위대한 예술가들, 워홀의 팝아트, 뒤샹의 레디메이드에 대한 감상과 견해 영향, 첫 작업실 계약, 월세, 그림 크기에 따른 판매가 책정법, 갤러리 소유주들과의 관계, 당시에 받은 비평과 수상 이력 등을 아주 디테일하게 다룬다. 내가 미술사가도 화가도 아닌데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으면서도 이런 자질구레한 게 은근 재밌어서 건너뛸 마음은 들지 않았다.
동독에서 대학 나왔는데도 서독에서 예술가 동료(친구)가 필요해서 다시 대학에 입학한다거나, 어느 갤러리와 어떤 조건으로 계약을 맺을지를 고민하는 것, 작가로서 자신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칠지 고심하는 것, 틈틈이 알바도 하고, 장인한테 지원받고... 리히터는 초창기부터 꽤 인정을 받은, 무명기가 짧은 작가임에도 그때나 지금이나 어디서나 예술가로 먹고살기가 이렇게 빡세고 신경 쓸 게 많구나 싶어서 착잡해졌다.
그리고, 동독에서 이미 벽화가(그나마 정치에서 자유로운)로 이른 나이에 꽤 부유하고 만족스럽게 생활할 수 있었음에도,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을 보고..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지만(모든 인간의 기본),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더 자유롭게 더 잘 창작할 수 있는지를 판단해, 자신을 더 알맞은 장소로 옮겨야 한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작품 하나 더 만드는 것보다 더 성실한 노력일 수 있음을 느낌....
나는 무엇보다 그의 회색유리판넬과 회전하는 유리판넬 설치가 인상적이었는데, 그의 회화 자체에 대한 존재론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리의 투명함, 아무 대상이나 비춰보이는 무작위성, 뚫을 수 없음, 어디까지나 표면, 미끄러짐, 하지만 세계 안에 존재함, 회색의 불확실성, .... 팝아트가 대히트를 치고 회화의 죽음이 선언되고, 엄청나게 다양한 매체로 분화하는 와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회화 painting에, 캔버스라는 표면에 머물렀기에 자신의 입장, 회화론을 표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지 싶다.
그는 그리는 대상에 대한 애착이나 의도를 지우고자 했고, 감정도, 이념(동독의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진저리)도 전달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사진회화들에서 넓은 붓으로 칠해 보여주는 번짐 효과는 시선을 표면에서 미끄러지게 하고 피사체의 얼굴을 뭉개어, 일종의 브레히트식 소격 효과를 낳아 감정적 연결을 차단한다.
하지만 리히터의 카탈로그 레조네(전작목록)에 차례로 실린 3편을 보면, 사진의 선택은 그가 당시에 말했던 것처럼 그냥 무작위로 고른 옛날 가족사진들이 아님이 연구자에 의해 뒤늦게 밝혀졌다. 노년의 리히터도 시인했다. 당시에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화가로만 비칠까 봐 두려워서 제목만 붙이고 구체적인 가족사에 대한 언급은 피했다고... <마리안네 이모>는 18살에 조현병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나치치하에서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의 <루디 삼촌> 은 리히터에게는 어린 시절에 이상적인 남성상, '조국을 위해 전사한 영웅'으로 각인된 인물이었다. 실은 나치에 부역한 평범한 독일군인이다. 이 그림은 유독 악의 평범성 어쩌구 할 때 자주 인용되는 그림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것은 다이빙 선수 여성들의 신체다.
그 밖에 다른 광고 이미지를 이용한 사진그림들의 주인공들도 가정 안의 끔찍한 폭력이나 살인의 스토리가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 그림들이 갖는 어두운 냉랭함과 기괴함은 비단 표현방식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느낌적 느낌이 옳았다는... 이런 배경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한테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었다...
그 회색 사진회화들은 후기의 붉고 따스한 색조의 그림들과 대비되는 동시에, 전체 전시로 봤을 때는 균형을 부여한다...
거의 20세기 중후반의 모든 미술사조를 가로지르며 작품활동을 왕성히 하고 현재 세계 최고가로 작품이 거래된다는데...호크니랑... 요전 세대로는 피카소도 그렇고.. 그정도 대가가 되려면 오래 살아야 하나. 결혼3번, 60대에도 자식을 둘이나.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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