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이들.....
후박나무 2003/02/17 16:38
후박나무님을
차단하시겠습니까?
차단하면 사용자의 모든 글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책은 불교를 서양 철학의 관점에서 비교, 분석하려는 서양의 철학자인 아버지와 불교수행에 정진하는 서양 승려인 아들과의 대담입니다.
아버지 장 프랑수아 르벨은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대학교수로서 비종교적, 무신론적 입장에 선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마티유 리카르는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과학자에서 티벳 불교의 승려로 변신한 인물입니다.
왜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서 대담은 시작합니다. 자신이 쌓았던 과학적 경력은 결코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은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에 따라, 보다 더 중요한 자신에 대한 본성을 깨닫기 위해 출가를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불교는 엄밀하게 말하면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에는 신이 없습니다. 단지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내적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생겨나는 확고부동한 확신이라면, 불교 역시 종교입니다.
불교는 교리가 아닙니다. 원죄의식도, 신의 창조론도 없습니다. 단지 누구에게나 내재한 불성을 명상을 통하여 깨달을 뿐입니다. 불교는 자신의 본성을 찾아가는 '도' 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고통은 무엇일까요? 불교에서는 고통이 욕망, 집착, 증오, 자만, 질투, 무분별함 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자아' 라는 개념에서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자아는 어떠한 실재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고통을 벗어나는 길이라고 합니다. 자신과 사물들의 궁극적인 본성을 발견하는 깨달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자아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수 있으며,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을 권합니다.
왜 서양에서 불교가 그토록 관심을 불러일으킬까요? 서양 문명은 오래도록 역사적 발전과 기술의 진보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가치가 결여된 물질적 진보는 더 이상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진 않았습니다. 안락함이 결코 행복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양은 존재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고, 서양은 소유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소유는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소유에 대한 욕망이 많아질수록 내적 변화에선 더 멀어지게 됩니다. 서양에선 더 새롭고 더 편리한 것을 추구하며 기술의 진보는 이루었습니다. 아울러 삶의 조건은 개선되었으나 존재의 질에 관한 문제는 소홀하게 된 것입니다.
개인은 더 이상 고유한 존재를 갖지 못하고 사회라는 기계의 한 부품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서양은 과학의 영역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철학이나 종교가더 이상 사람들을 위로할 수 없게 되었고 이 빈자리를 불교가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불교의 모든 종교를 초월한 진리에 대한 열린 시각이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불교는 결코 강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를 부정하지도, 믿기를 권하지도,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질 높은 삶을 구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존재에 내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존재에 내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우리 자신의 정신을 제대로 알고 변화시키는 일 뿐이라는 것이 승려의 이야기였습니다.
PC버전에서 작성한 글은 PC에서만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