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어차피 인간은 다 쓰레기라 우리도 그 쓰레기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려 노력하고 있는 거라고.
사회의 부조리함에 분노하고 개혁을 부르짖는 건 약자들뿐이라고.
어차피 내가 강자라면, 내가 강자가 되어서 오늘 내 주머니에 돈이 들어온다면, 사회가 아무리 썩었든 어떤 부정부패가 저질러지고 있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 말을 듣자 역설적이게도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결국 약자들이겠구나,
사실은 약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강하고 위대한 사람들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죽는 순간 그녀는 가족을 떠올렸다.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할 가족을 떠올렸다.
어렴풋이 보기만 했을 뿐 밟아보지 못한 도로처럼
그녀가 아직 만나지 못한 남편과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
영영 누리지 못한 행복한 삶을 떠올렸다.
토니 파슨즈의 《살인 기술자 MURDER BAG》는 집단 폭행을 당한 한 소녀의 처참한 죽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부유한 투자은행가 휴고 벅, 마약을 끊고자 노력 중이던 노숙자 아담 존스가 차례로 살해당한다. 사인은 질식사.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한 전문가의 솜씨로 기도와 경정맥, 경동맥까지 단숨에 베여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망했다.
지문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사건 현장, 인터넷상에서 범인을 자처하며 영웅으로 추앙받는 ‘도살자 밥’, 흥미 위주로 왜곡된 기사를 써 제끼는 기자 스칼렛 부시까지, 수사는 갈수록 난항을 겪는다.
강력반으로 새로 부임한 맥스 울프 경장은 뛰어난 눈썰미와 결단력을 갖춘 사람이다. 그의 가족은 현재 어린 딸 스카우트와 강아지 스탠 뿐이다.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옛 사진을 통해 첫 번째 피해자 휴고 벅과 두 번째 피해자 아담 존스가 같은 기숙학교의 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울프 경장은 문제의 학교인 ‘포터스 필드’로 향한다. 그곳에는 사진 속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인물, 가이 필립스가 체육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와 인접한 숲에서 필립스는 범인의 공격을 받아 중태에 빠지고 범인을 뒤쫓아 간 울프 또한 습격을 당한다. 죽음의 순간에 하나뿐인 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범인에게 자비를 구하며 애원하는 울프.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가 습격당한 뒤 기어서 도망치던 영상이 도살자 밥의 SNS에 올라오며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다.
얼마나 세게 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얼마나 세게 맞을 수 있느냐, 세게 맞고서 버틸 수 있느냐,
그게 중요한 거야.
그래야 상대에게 반격할 기회가 생기잖아.
그리고 세 번째 희생자, 가이 필립스가 결국 사망하면서
사건은 연쇄 살인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첫 번째 살인은 비극이다.
두 번째 살인은 비극적 우연이고.
하지만 세 번째 살인은 언론의 기름진 먹잇감이다.
빛바랜 사진 속에 등장하는 소년은 모두 일곱 명.
첫 번째 희생자,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가정부와 바람을 피우며 부유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던 은행가 휴고 벅.
두 번째 희생자, 심성이 곱고 음악 실력이 뛰어난 소년이었지만 방황하는 마약 중독자가 되고 말았던 아담 존스.
세 번째 희생자, 폭력 성향을 띠며 학생 시절부터 숱한 사건 사고를 일으켰던 뚱보 가이 필립스.
네 번째, 인도에서 장기간 거주했던 가문 출신이며, 앞서 세 희생자의 죽음 이후 눈에 띄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인권 변호사 살만 칸.
다섯 번째, 쌍둥이 중 하나이자 무리의 리더 격이었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노련한 정치가 벤 킹.
여섯 번째, 쌍둥이 중 얼굴에 흉터가 있으며, 그를 아는 모든 이의 호감을 사던 육군 대위 네드 킹.
일곱 번째, 성년을 맞이하기도 전에 바다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미술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귀족 출신 제임스 서트클리프.
이들 중 진짜 ‘살인 기술자’가 있을까?
도살자 밥은 누구일까? 그는 진짜 범인과 동일 인물일까?
《살인 기술자》는 처음부터 ‘살인 동기’를 알려주고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느슨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섬세하게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따라 차근히 족적을 따라가게 만든다. 잔인하면서도 잔잔하고, 잔잔하지만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으며, 폭풍 전야처럼 고요하게 흘러가면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스토리의 힘이 있다.
예측 가능한 부분과 읽으면서 가볍게 흘려 넘겼던 암시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 끝부분에 가서 급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은 있는데, 그렇게 끝나버리나 싶었을 때 독자가 알아서 적당히 납득하고 넘어간 부분에서 뒤통수를 치며 마지막 반전을 선사한달까.
그는 우리의 결핍된 부분을
모두 채워줬습니다.
아담과 살만처럼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녀석들에겐
소속감을 느끼게 해줬습니다.
한 가족으로, 한 민족으로,
그가 조성한 은밀한 세상의 일원으로 받아줬습니다.
제임스처럼 남다른 녀석에겐
특별한 재능을 타고났다고 느끼게 해줬습니다.
그는 늘 우리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을 무시하고 비웃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를 어루만지고 핥으며 아름다움과 진리를 설파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조종하고 싶으면,
그 사람의 ‘결핍’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 책에서 작가 토니 파슨즈는 그 부분을 무서울 정도로 적확하게 꼬집고 있다.
넬레 노이하우스 이후로 딱 이거다 싶게 흥미를 끄는 미스터리 소설이 없었는데,
이 살인 기술자의 인물도를 보니 이번 에피소드 하나만 가지고 단권으로 끝날 내용은 아닌 것 같고,
앞으로도 시리즈물로 맥스 울프 경장과 주변 인물들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아직까지는 타우누스 시리즈의 보덴슈타인과 피아 콤비가 더 친근하지만,
살인 기술자에서는 나타샤가 상당히 매력적이라, 나타샤라는 캐릭터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울프라는 인물에게서 끌어낼 수 있는 시너지 효과가 무궁무진할 것 같다.
아무튼 뒷이야기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