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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sy0810의 서재
  • 헤드라이너
  • 임국영
  • 13,500원 (10%750)
  • 2023-01-20
  • : 139
임국영, 『헤드라이너』, (창비)(2023)

<무대 밑에서>
* 저항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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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 루피. 죽고 사는 일보다 더 끔찍한 건, 쓸모를 잃고 버림받는 거야.]_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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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이너』의 인물들은 ‘헤드라이너’가 되지 못한, 못할 존재다. 오히려 자본주의 세계에서 “쓸모를 잃고 버림받는” 존재들에 가깝다. 그 ‘쓸모없음’에는 ‘저항’에 대한 열망이 있다. “무슨 저항이라는 단어만 붙으면 사족을 못 쓰던 놈”처럼 ‘사보타주’, ‘볼셰비키’, ‘우드스톡’ 등 과거의 기표를 끌고 온다. 하지만 ‘저항’도 보편적인 인정을 받아야 ‘저항’이 될 수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제대로 된 무대에 가까이 가지도 못한다. 이름만 거창할 뿐 그들의 저항은 ‘신화’가 될 수도, ‘폭거’가 될 수도 없다. 저항에도 쓸모와 쓸모없음의 논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 개인적인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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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의 개인적인 신화는 그럴듯한 숭배 대상도 메시지도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마치 한번 죽고 다시 태어난 듯한 감각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남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을 테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태어난 일에 감사했다._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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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항 자체가 결국 강력한 자본의 포섭력 앞에서 무너지는 것 아닐까 생각된다. 페스티벌이 록과는 관계없는 부스들이 늘어나고 “사각의 장소”였던 ‘BAR-K’가 손님들이 늘어난 것처럼 저항의 기표들은 자본의 논리를 따르게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이고 미미한 저항이 아닐까?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저항은 자본의 관심조차 받지 못할 정도다. 자본의 방심을 틈타 공격하는 것은 그렇게 “개인적인 신화”가 가진 가능성일지도 모르겠다.

* 소설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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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컴, 이지 고.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항복의 말을 외쳤다. 제 소설을, 소설 같은 걸 누가 보겠습니까. 진심입니다._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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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도 이처럼 미미한 저항이 아닐까 생각했다. 공원의 시스템을 폭로하면서 상급자들 앞에서 소설의 무의미함을 피력하고(「비둘기, 공원의 비둘기」,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면서(「태의 열매」) 오히려 아버지와 신격화하고 “성장과 무관한 성장소설”을 만들기도 한다.(「악당에 관하여」) 소설은 개인적인 저항의 이야기에 주목하면서 메타적인 저항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토바이의 묘’에 처박힐 수도 있겠지만.

소설을 읽으며 인물들의 행동과 말에서 폭력성과 남성성에 거부감이 들었다. 앞서 인물들의 미미한 저항이 갖는 가능성을 이야기했지만, 한편으로는 저항의 이면 또한 존재한다. 작가는 이를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기존 저항의 기표가 가진 남성성과 폭력성에 대한 반성을 보여주고자 한 것 아닐까?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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