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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희님의 서재

그렇게 서귀포시 정방동136-2번지에서 바다 보면서 3개월 남짓 살았어. 함석지붕집이었는데, 빗소리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우리가 살림을 차린 사월에는미 정도였는데, 점점 높아지더니 칠월이 되니까 솔 정도까지 올라가더라. 그 사람 부인이 애 데리고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시 정도까진 올라가지 않았을까? 
그러던 어느 밤,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한 친구와 술을 마시고 밖으로 나왔는데, 거기서 그들을 기다리던 건 시정거리가 3미터도 안 될 정도로 짙은 안개였다. 그건 단순한 기상현상이아니라 부유하는 상실의 덩어리와 같았다고 세진은 회상했다. 술집에서 친구가 들려준 위로의 말들은 헛되이 사라졌는데, 안개 속을 걸어가는 일만은 무엇보다 위안이 됐다고. 대기 속에서 순환하는 바람들과 물방울들과 따뜻하고 차가운 공기들이 그를 감싸고
‘괜찮아, 다 괜찮아‘ 속삭이는 느낌이었다고. 그리하여 안개 속을걸어가는 동안 그를 둘러싸고 있던 고통과 불안은 서서히 사라졌고, 마침내 집 앞에 이르렀을 때 세진은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건강하고 젊은 그들에게 고통이란 다른 세상의 일들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젊고 건강했으나 지난 몇 년의어느 순간에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러면서 나는 고통의측면에서는 800년 전의 옛사람과 같아졌다. 말하자면 나는 단테가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겪은 개별적인 고통이 어떤 것인지구체적으로 밝히는 건 중언부언일 뿐이리라. 항암약물투여실 병상마다 앉거나 누워 있던 모든 암환자들의 고통이 그렇듯, 나의 고통 역시 개별적이고 구체적이었지만, 또한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세상에 널린, 흔하디 흔한 고통이었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는 유행가 가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코웃음을 치곤 했는데, 이제는그 통속적 모순의 세계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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