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흐른다. 이 흐름을 어떤 사람들은 발전으로 보고, 어떤 사람들은 순환으로 본다.
그냥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세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케이블 티브이에서 하는 응답하라 시리즈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이제 겨우 20년 전 이야기인데도 그때에 비해 지금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시간의 흐름은 순환처럼 보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사는 모양을 보면 외형 빼고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변화하고 발전하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아웅다웅하고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은 크게 보면 샌드위치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책의 처음과 마지막에 책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가 나타나고 그 안에 이야기가 풀어지는 형식이다.
책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주인공 박민우가 강연을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강연의 주제는 ‘구도심지 개발과 도시 디자인’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잔디’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나는 문득 우리가 언제부터 마당에 잔디를 깔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우리네 마당은 마사토를 깔거나 그냥 흙마당이었다. 그리고 마당가 담장 밑에 자그만한 하단을 만들어 채송화, 봉숭아, 과꽃, 수국 등을 심거나 텃밭을 만들었다. 잔디는 사실 우린 기후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묘지에 떼를 입히는 용도로나 사용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언젠가부터 마당에 잔디가 깔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중산층 정원의 상징이 된 것이다.
앞에 나오는 ‘구도심지 개발과 도시 디자인’과 마지막에 나오는 ‘잔디’가 서로 연결된다.
도심지 개발이라는 것은 과거의 모습을 덮고 보기에 좋은 새 건물을 세우는 과정이다. 잔디를 심는 것도 지저분해 보이는 흙 마당 위에 보기에 좋은 잔디를 까는 과정이다. 이렇게 바뀌는 것을 성공과 발전이라고 하고 이 모습을 꿈꾸며 사람들은 살아갔다.
이 책은 이런 세상의 커다란 흐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의 중심인물은 4명이다.
이 중 두 명은 과거를 대표하고, 나머지 두 명은 현재를 대표한다. 과거를 대표한다고 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났고 현재를 함께 살고 있다.
이 4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떠나고자 했었고, 하고 있다.
과거를 대표하는 박민우와 차순아는 자신이 어릴 적 살았던 달골이라는 판자촌을 떠나기를 위해 노력했다. 이들이 달골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은 공부였다.
그는 달골을 벗어나고 싶다고 몇 번이나 되뇌곤 했다. 그러기위해서는 공부밖에는 길이 없다고.
현재를 대표하는 정우희와 김민우도 현재의 힘든 삶을 벗어나고자 무진장 애를 쓴다. 정우희는 연극 연출과 대본을 쓰면서 밤새 편의점에서 알바를 한다. 김민우는 잠시 쉴 겨를도 없이 끊임없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면서 산다.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노력해도 이 갑갑한 현실을 벗어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처음 태어나면서 주어진 환경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세상이 되었다.
내가 녀석을 보면서 느낀 것은 요샛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면 어지간해서는 뭘 하든 한다는 것이다. 무턱대고 개판치지만 않는다면 자신의 길에서 크게 밀려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꿈도 사랑도 결혼도 다 포기하며 살아간다.
다들 포기하고 산대요.
현재를 떠나고자 하는 점에서 이 네 사람은 다 같은 쪽에 있다. 하지만 이 탈출에 성공했느냐를 놓고 보면 나뉘게 된다. 박민우 vs 차은아, 정우희, 김민우 이다.
박민우는 탈출에 성공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들어갔고, 좋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을 하고서 유학를 다녀온 후 건축 분야에서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박민우와 같은 동네에 살았던 차은아는 떠나는 것에 실패했다. 공부가 유일한 탈출구였지만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달골에서 기반을 잡고 있던 재명이 형과 살림 비슷한 것을 차리게 된다.
현재를 대표하는 김민우는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고, 정우희는 여전히 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바둥거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정말 박민우는 탈출에 성공했을까? 이 책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컴퓨터에 지도를 띄어놓고 새로운 주택 부지를 찾으면 맞춤한 곳에 집 짓는 상상을 하는게 요즘의 내 유일한 낙이다.
그런데 그 집에는 함께할 가족이 없다.
나는 길 한 복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과거의 현실에서 탈출했던 박민우의 오늘은 자신이 탈출하고자 했던 달골의 생활과 비교해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집은 있지만 가족이 없고,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는 박민우의 모습은 집은 없어도 가족은 있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살았던 달골의 생활과 비교해서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겉으로 보이는 환경의 변화가 성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정우희가 내뱉는 자조적인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명한 극작가나 연출가가 되면 그대는 사는 게 좀 나아질까. 선배들을 보면 딱히 나아지는 것 갖지도 않고 막막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더라
정우희가 현실의 고달픈 현실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연극계에서 인정을 받고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현실은 그렇게 되더라도 현재와 별 달라질 것이 없다.
결국 이 책은 남루한 현실에 탈출하고자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과 탈출은 했지만 여전히 남루한 현실에 붙잡혀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냥 이 팍팍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가? 이 책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강아지풀이라는 잡초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강아지풀에 대한 언급은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정우희가 병으로 죽은 차은아의 집에 물품을 정리하러 갔을 때이다.
그녀의 집에서 몇 가지 물품을 챙겨들고 나오는데 현관문 밖 복도에 내놓은 빈 화분에 강아지풀이 수북이 자라나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니 오랫동안 방치되어 억새풀처럼 누렇게 빛이 바랜 상태였다. 나는 그녀가 일부러 강아지 풀 따위를 화분에 심지 않았을 거라고, 씨앗이 날려와 돋아난거겠지, 하고 단정 지으면서도 이렇게 무성해지려면 물을 줬을텐데, 싶었다.
다른 한 번은 박민우가 예전에 살던 집에 잔디를 깔았던 때를 회상할 때이다.
어느 날 마당에 서서 잔디를 걷어내고 마사토를 깔아버릴까, 궁리를 하다가 마당가에 심어놓은 꽃들 사이에서 몇 줄기 삐죽이 올라와 있는 솜털 모양의 익숙한 풀들을 발겨했다. 일하는 아줌마와 아내가 미처 뽑아내지 못한 것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강아지풀이었다. 나는 그것을 뽑아내려다가 내버려두었다. 일부러 심어놓은 화초들과 어우러져 있는 모양새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강아지풀은 꽃이나 잔디와 달리 누가 키우기 위해 일부러 심지 않는다. 모르는 사이 씨가 날아와 화분에, 마당 한구석에서 자라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자라난 강아지풀은 일부러 심어놓은 화초들과 어우러져도 꽤 어울린다.
우리 인생에도 강아지풀과 같은 순간이나, 사람, 일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노력해서 얻으려고 하거나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내 삶의 주변에 들어와 있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
처음 일부러 화분에 심지는 않았을지라도 이 작고 소중한 것들을 물을 주고 키워나가는 것은 오롯이 내 몫이 된다.
길 한복판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을 때 고개를 들어 저 멀리만 보지 말고 내 주변에 있는 작고 소중한 것들을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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