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아마도 새로운, 예기치 않은 수많은 ‘끼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게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 ‘끼리’의 관계를 넓혀 가면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구원이 아닐까? 그래서 예수는 성전이 아니라 집에서 구원을 선포한 것이 아닐까? 성전에는 늘 변하지 않는 ‘끼리’들만 있으니 말이다.
구원은 끼리의 변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끼리의 변주는 결국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너는 안 돼!"라고 했던 야멸찬 절벽을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를 넘어설 수 없어!"라는 냉정한 금지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함께할 일 없었던 이들이 함께 둘러앉은 상이 얼마나 복된 구원의 징표인지를 알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