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사라는 신인작가의 자기경험을 기반으로 한 에세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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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10년간의 회사생활 속에서 직장 상사에게 극심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공황장애까지 겪었는데 이 책에서는 이를 극복하는 과정과 거기서 얻은 개인적인 깨달음을 담았다.
우리나라에서 대학 졸업하고 직장생활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아마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 자체는 생소해도 저자 알리사가 겪었던 직장 내 괴롭힘이 어떤 것인지는 다들 알 것이다.
무슨 괴물 같은 인간만 직장 내 괴롭힘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 작가가 지적했듯이 가스라이팅은 전세계, 모든 관계에 뿌리깊게 만연해있다. 원시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세계는 원래 정글이고 불평등했으며, 상하관계가 기본 베이스다. 위에서 까라면 까는 문화는 노예제를 비롯 인간사 전반에 걸쳐져있으니까.
잘 깨닫지 못해서그렇지 부모 자식 간에도 충분히 있을 수 있고, 연인 사이나 친구관계, 그리고 상하 질서가 매우 뚜렷한 직장내에서는 더욱 집요하고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상대방을 내 의도에 맞춰 꼭두각시처럼 조정하려는 모든 불순한 시도가 가스라이팅이라고 정의내렸다.
그럼 좀 더 자세히 리뷰해볼까 한다.
원래 한 권의 책은 목차로 그 내용이 압축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는 총 5가지 챕터와 에필로그로 이뤄져있다.
챕터 1의 내용은 "가스라이터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저자가 직접 겪은 회사 내 가스라이팅 사례이고 챕터2는 결국 퇴사를 선택한 저자가 학대로부터 스스로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챕터3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가스라이팅에서 회복한 저자가 오히려 가스라이팅을 역이용해 본인을 작가이자 컨텐츠 제작 전문가로 발전시킨 이야기가 나온다.
챕터4는 해외에서도 이와 같이 성공한 유명인들의 사례(켈리 최,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등등)하며, 챕터5에서는 이 모든 내용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내용으로 이뤄져있다.
첫책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현재 직장 내 괴롭힘이나 따돌림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가스라이팅의 저자 사례가 여러 차례 반복되긴 하지만 그만큼 본인이 겪은 고통이 크고, 또 읽다보면 이런 류의 상사를 많이 봤기에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아 충분히 흥미로웠다.
p.60 "그렇다면 왜 이렇게 뺑뺑이를 돌리는 걸까? 단지 건망증 때문일까? 이건 가스라이터의 특징 중 하나다. 가스라이터는 특별한 이유없이 거짓말을 해서 상대방이 '내가 잘못 생각한 건가?' 라고 자신을 의심하게끔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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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아주 흥미로웠는데 내가 겪었던 어떤 망할 팀장도 딱 저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빨간색으로 칠하라고 들어서 그렇게 해갔는데 본인은 파란색을 지시했다고 우겨댄다. 그럼 당할 때는 '그런가?' 하고 순간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일이 반복되면 내가 들었고 판단했던 모든 게 희미해진다.
마치 지록위마처럼 사슴을 말이라고 우기는 거지.
물론 이 사자성어는 외려 윗사람을 농락할 때 쓰는 말이지만 가스라이팅을 오래 당하면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거짓말을 해도 내 잘못인가? 하고 자신만을 돌아보게 되어 있다. 그만큼 자존감이 떨어지고 상황판단력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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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이오, 내 탓이오는 종교적인 입장에서는 충분히 아름다운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늘어야 마땅한데 가스라이터에게 대항할 때는 우리 모두 니 탓이오, 니 탓이오를 잊지 말자.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계속 별 것도 아닌 걸로 지적질을 당하면 그 누구나 자기 판단력에 확신을 잃게 된다. 또한 뺑뺑이! 내 경우에는 이미 끝나고도 남을 하찮은 일조차 자꾸 퇴짜를 맞아서 하고 또 하고 컨펌이 나질 않은 적이 있다.
결국 10번 이상 반복되어 나가 떨어질 때쯤 제일 허접해보이는 안이 통과되었는데 ok 사인을 받고도 기분이 나빴다. 처음에 제시했던 아이디어가 훨씬 나았기 때문.
이 책을 읽고 그게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적 학대, 꼭 때려야 학대가 아니다.
다행히 이 책의 저자는 일을 꽤 잘 하는 타입이었나본데 이게 권력자가 가스라이터가 되면 부하직원이 일잘러이건 아니건은 크게 관계가 없다.
그 사람이 승인을 해야 일이 끝나는 입장이라면 아무리 자기 선에서 잘했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10번 이상 퇴짜맞고 그 사람이 집에 갈 때 즈음 최악의 아이디어가 채택되면 혼란스럽다. 업무 평가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점수를 줄 리 만무하고 승진이나 연봉협상 등에서 전부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직장 다니면서 미친 상사 만나면 답이 없는 거다. 본인의 노력만으로는 일잘러로 인정받을 수도 없거니와 주위 동료들은 권력관계에 예민하기 때문에 왕따에 동참하기 십상이다.
모두들 상사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팀장이건 부장이건 윗선에게 미움받는 사람과 한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정글의 무리생활이라는 거다.
나는 알리사 님이 퇴사를 한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더 빨리 했어야 했다. 10년씩 버텨가면서 싫은 사람 얼굴 볼 필요가 없다.
끈기가 없다는 둥, 공황장애 왔다고 그만두면 다른 회사는 어떻게 다닐 거냐는 둥 굳이 남의 의견에 휘둘려가면서 인생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돈이 웬수지만.
마치 남들의 조언은 나를 위하는 것인척 포장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직접 당해보면 이 세상에 나보다 중요한 존재는 없으며, 설사 내가 돈 안 벌어서 가족의 생계가 더 어려워진다고 해도 일단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한번쯤 해봐야 한다.
비행기에서 극한 상황에서 탈출할 때도 보호자가 먼저 산소마스크를 쓰게 되어있다. 그래야 자식이나 돌볼 사람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넉다운이 되면 가족을 어떻게 살린단 말인가?
전반부가 가스라이터(가해자)에 대한 분노였다면 후반부는 이를 극복하고 독서모임을 지도하는 등 사회적으로 성공해가는 모습을 그려서 속이 시원하다.
그리고 무척 짧은 시간 안에도 이렇게 사람이 극복할 수 있구나, 독서란 사람에게 이런 힘을 주는 구나 알게 되어서 즐거운 경험이었다.
지금 직장 내 가스라이팅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직접 경험만큼 확실한 건 없으니까.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협찬받아 직접 읽고 쓴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