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 소설은 "달려라, 메로스", "인간실격", "사양" 이 세 가지가 먼저 떠오르는데 "사양"은 작가의 실제 삶이 소설 속 주인공들과 절묘하게 어우려져 이게 픽션인지 아니면 개인사를 바탕으로 쓴 사소설인지 헷갈릴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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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 두 가지의 경계선에 있는 듯하다.
"사양" 책 날개에는 작가의 일생이 짧게 압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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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집안의 11남매 중 열째로 태어나 유모 손에서 자라다 숙모에게 맡겨져 학교를 나오고 자라서는 작문에 재능을 보이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는 끊임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다.
맨 뒤에 작가 연보가 나와있어서 세어보니 총 5번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연인과 함께 사망했다. 당시에도 아내가 있고 자식들도 있었던 것 같다. 39살 생일인 6월 19일 아침 시신이 발견되었다.
작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기억하고 있었는데 십수년만에 다시 자세히 작가연보를 읽고 다시 놀랐다.
어째서 끊임없이 죽으려고 했을까? 이 양반은.. 그것도 사귀던 여자들이랑?
사실 다자이 오사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 문학을 읽어보면 수어사이드(좀 흉하니 단어 좀 대체하겠음)에 관한 인식이 우리나라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냥 사죄만으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렀을 때도 주인공들이 목숨으로 사죄한다며 최후의 방법으로 선택하고, 부모와 자식이 함께 생을 달리하는 '무리신주((無理心中))'라는 단어 역시 일본어 어휘집에서 처음 봤었다.
그 때 교수님 말로는 우리나라에는 이런 말이 없었다고 했다. 오래전 일이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같이 죽는다는 개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본이란 나라가 놀라웠다. 사람은 오는 것도 혼자, 가는 것도 혼자라고 생각했으니까.
"사양"에서는 일본 전후에 몰락한 귀족집안 가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병약하지만 아름다운 어머니는 뼛속까지 귀족이자 귀부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를 제대로 지켜낼 다른 가족이 없다.
외삼촌이 있으나 큰 도움은 안 되고, 아이를 사산한 딸은 남편과 이혼해서 집으로 돌아와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하나 뿐인 남동생은 마약중독에 알콜 중독자로 나온다.
그나마도 전쟁에 차출되어 나가 소식도 끊겼는데 진짜 불행은 군을 제대하고 그 문제투성이 남동생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그 아이가 없을 때는 두 모녀가 도쿄의 집을 팔아 한적한 시골 산장으로 이사오고, 갖고 있는 물건을 파는 것으로 억지로 생활을 꾸릴 정도였지만 남동생이 돌아와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자 가세는 더욱 빠른 속도로 기울어진다.
빚을 갚아주고 갚아줘도 끝이 없고 남동생은 방탕한 생활에서 전혀 돌아올 기미가 없다.
그래서 책 제목도 "사양"이다. 이미 세상은 바뀌어 더 이상 귀족이니 평민이니 이런 게 통하지도 않는데 바뀐 세상에 적응도 못하고, 일자리도 못 찾은 몰락 귀족의 자제들이 살아남을 길은 없다.
그저 끝없는 내리막길, 빛이 사그러져가는 불행을 묵묵히 감내하는 가즈코(사양의 주인공이자 몰락 귀족 집안의 딸)가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이어서 남동생이 세상을 등진 후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싸우는 내용이 담겨있다.
책 줄거리만 보면 꽤나 어두워보이지만 실상 이 책의 문체는 상당히 아름답고 그래서 더 퇴폐적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생산적인 이야기도 없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허무와 좌절만이 진하게 남아있다. "누나. 난 귀족이야."로 유서를 끝맺음한 동생의 고통과 이 책에 나온 저 전쟁시처럼 말이다.
p. 44
"작년엔 아무 일이 없었다.
재작년엔 아무 일이 없었다.
그 전 해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이런 재밌는 시가 종전 직후 어느 신문에 실렸는데,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 일이 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공감하게도 된다. 전쟁의 추억이란 말하기도, 듣기도 싫다.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이 죽었는데도 진부하고 지루하다. "
이런 구절이 책에 나와있다. 이 시 한 편으로도 <사양>이란 어떤 소설인지 느낌이 온다.
이 집안의 자랑이자 보석같은 어머니는 아름답지만 병약하다. 남매는 그나마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나쁜 생각을 버리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를 쓴 것 같다. 각자의 방식대로.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모든 것은 빠르게 변해버린다.
p. 10
"닭고기 같은 것을 드실 땐 우리가 보통 접시를 달그락거리지 않고 살을 발라내려고 애쓰지만 어머니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손가락 끝으로 뼈 부분을 잡고 들어올려, 이로 뼈와 살을 발라서 드신다.
그런 미개한 행동도 어머니가 하시면 사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상당히 에로틱하기까지 해서, 확실히 진정한 귀족은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된다."
남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귀족 어머니는 과거 화려해던 시대를 상징한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결국 죽었다. 지난 시절은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남동생은 어머니가 죽자 유서를 남기고 생을 달리한다. 차마 병약한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저지르지 못하고, 누나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러 도쿄로 올라가자 그 틈을 타서 집안에서 감행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꼭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가족도 없는 누나에게 험한 꼴을 보였어야 하는지는 이해가 안 갔지만 소설이란 그저 아름답고 담담하게 흘러갈 뿐 독자 개개인의 관념이나 판단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래서 누나인 가즈코는 어떤 선택을 했느냐? 그녀는 동생 때문에 알게 된 작가 우에하라라는 늙수룩한 중년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 실상은 사랑이라기보다 그녀 혼자만의 착각에 가깝다고 느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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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하라는 남동생이 도쿄의 술집을 드나들며 빚을 질 때, 누나인 가즈코에게 돈을 받아서 대신 갚아주는 일을 한 것 같은데 어쩌다 가즈코와 우에하라가 엮여서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그의 아이를 갖기를 소망하게 된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우에하라는 이미 유부남이고 아름답고 우아한 아내와 딸도 있는 인물이고 가즈코 역시 그의 가정을 파괴할 생각이 없다.
결국 귀족집안 출신인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남자의 아이를 낳아 혼자 기르겠다는 건데 안타깝게도 우에하라는 그녀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
우에하라는 가벼운 인물이어서 그녀가 남몰래 원한대로 소망을 이뤄주지만 이 기묘한 소설의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젠 어머니도 동생도 없는 가즈코에게 뱃속의 아이라는 희망이 생긴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졌다.
그 옛날 일본 소설 결말에서 지금 현대 여성들이 결혼 없이 혼자 아이를 낳기로 선택해 키우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그저 하룻밤 욕망의 대상으로만 생각한 우에하라와 달리, 가즈코는 그를 사랑한다(?).
물음표를 찍은 건 그녀가 우에하라를 사랑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남자와 주인공 여인 사이에는 대단한 썸띵이 없었다. 오직 망상과 외로움만 있었을 뿐.
남자는 그녀의 편지에도 답장조차 하지 않았고 키스도 술 취해서 기습적으로 짧게 한 것 뿐인데 여기 어디 사랑이 있다는 건지..
그럼에도 다행스러운 건 가족이 없어진 가즈코에게 진짜 가족이 생겼다는 것(뱃속의 아이)과 이 모든 것은 그녀의 빅픽쳐였다는 것이다.
동생과 달리 가즈코는 좀 더 현실에 강인한 면모를 보이며 어떤 일이라도 할 의지도 있었다. 이 퇴폐미 가득한 소설에서도 가즈코를 통해 끝내 희망의 끈은 남아있던 셈이다.
p.188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내 도덕적 혁명의 완성입니다.
당신이 날 잊으셔도, 또 당신이 술로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나는 내 혁명을 완성해 나가기 위해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의 보잘것없는 인격에 대해 난 얼마 전에도 누군가에게 여러 가지 들었습니다만, 내게 이런 강인함을 준 것은 당신입니다. 살아야 할 목표를 준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그리고 남동생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이 녀석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다만 상대가 기절초풍할 의외의 대상이었으니(유서에서 누나에게만 밝힘) 당시 일본에서 이 소설이 초판 만여 부가 팔렸고 이후에도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이런 흥미로운 남녀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작가의 개인사와 맞물려서 말이다. 어머니를 묘사한 문체도 유난히 아름다웠지만 전후 일본 사회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고 생의 유서에도 뜻밖의 사실도 실려있어서 끝까지 재밌게 읽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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