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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의 사진처럼 읽는 서재
  • 나는 본다, 사진이 나를 자유케 하는 것들
  • 이광수
  • 13,500원 (10%750)
  • 2019-11-22
  • : 108


남들처럼 직장 다니면서 평범한 월급쟁이로 살다가, 무슨 바람 불어 오지랖같이 평범하지 않게 사진을 찍으며 살아온지 햇수로 꽤 지났다. 그동안 밥 먹고 일하며 월급 받으며 주어진 업무와 지시에 어김도 없을 정도로만 살았으나, 이 삶에서 특별히 차별화되는 비범은 전혀! 없었다. 다만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허기와 결핍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운을 타고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 부족함을 다른 무언가로 채우려 했던 이유였던 것은 아닌가 싶었다. 삶이란 시작부터 일정 부분의 운과, 이 영향과 놓여진 상황에 따라 선택이 종속된 채로, 시간과 공간은 떠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진은 바로 그 가운데에서 내 삶의 일정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누군 그게 전부가 돈의 목표를 삼았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적어도 그 대열에서 열외자이거나 낙오자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주류의 낙오이거나 메이저에 끼지 못한 마이너였다.



사진을 시작하고부터 너무나도 잘못 알아버렸다. 이 책에서도 밝혔듯이, 사진의 초보 시절에는 한 번쯤 격는 오류라든가 불합리부터 배우게 되는 게 많았다. 일면 사진이나 일류 사진을 쫓고자 했던 의욕의 과잉과,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들이 기존에 작가들처럼 떠들었던 것이 사진인양, 인문학적 바탕이 미천한 채로 시작된 얄팍한 명성과 칭송에 눈이 돌아갔던 잘못됨이었으며, 그리고 보여줄 수 있는 사진이 마치 자신의 실력 인양 착각하던 철부지 같은 사진을 찍겠다고 설레발을 쳤던 과오가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부끄럽고도 수치스러워진다. 사진은 특히 예술이란 사진은 소위 사진 협회류의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그런 게 사진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 버렸다는 점이다. 늘 오류는 항상 늦게 발견되는구나 싶었다.



예술로서의 사진을 찍겠다는 사람이 서재에 변변한 사진 책이나 사진 작품집 하나 없거나 감성을 쫓는다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시집 한번 보려 하지 않는, 그 인문적인 얇음과 깊이없는 피상적인 것들의 사진에서, 명예욕과 돈독이 잔득 들어간 목적의 사진을 사진 예술인 것처럼 호도하는, 소위 주류들의 사진 추종에 대해 알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일 년에 통틀어 사진 에세이집을 비롯한 사진적 인문학에 대한 책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카메라 회사가 매출을 걱정할 정도로 사진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소비하지도 않는다. 다 한때의 바람같이 유행가 가사처럼 사라져 버린 사진가들은 카메라를 내려놓았고 사라져 버리고 사진을 버렸다. 사진의 인문적인 심성 발달없이, 소위 일면 사진을 바라던 사람들의 사진은 더 이상 흥미도 없다. 그렇게 많았던 동호회도 폐업했고 유행처럼 번졌던 사진 갤러리 사이트들도 빛바랜 추억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방문객이 없는 빈 사진 갤러리는 그렇게 문을 닫았던 것도 사진이 유행으로 번진 후의 쓸쓸함만 남았다.



왜 이런 책이 이제서야 나왔을까 너무나도 아쉽다. 카메라가 유행처럼 번질 때 너도 나도 큰 D-slr 카메라를 매고 작가들이 된 것처럼, 사진을 찍을 무렵에 이런 사진 인문학적인 책이 나왔더라면 사진의 유행을 사뭇 달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책이 나오기까지, 저자도 물론 나조차 사진의 인문적 사색과 존재의 모색에 깊이가 없었던 이유였다. 그런 이유에서 사진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사진을 잘못 배운 탓도 크다. 그래서 살롱에나 걸린 사진이라며 비하하는 식의 사진을 그것도 못 찍어서 안달 내던 구태적이고 진보없이 알려주는 거짓된 정보를 통해 교과서처럼 받아먹었던 탓도 크다. 그래서일까 일러준 대로 그게 다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도 사진을 찍어도 허기지는 이유도 몰랐으며, 사유할 계기를 마련할 책도 부족했다. 사진 책은 나오기 힘드니 누가 책을 낼 엄두도 못 냈을 테고 차라리 지금과 같이 사진 책부터 찾았더라면 아무래도 사진을 대하는 자세가 사뭇 달랐을 것이다. 사진 책이라는 게 겨우 카메라 작동법이라는 사용법의 교과서로 배운 사진은 그저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잘 찍은 사진들만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사진도 모르면서 사진을 찍겠다고 몇 백만 원씩 카메라와 사진 장비에 투자하도록 만든 장비 제조업체들과, 장비 제조업체의 스폰서가 된 영업맨의 작가들이 사진의 소비와 생산 방식을 천박하게 만든 원인이었고 깊이 없이 부화뇌동한 호기심의 아마추어 작가들의 사진의 권력의 반론 없는 추동과 설레발이었다. 하루에 500킬로 이상 달리며 전국 방방곡곡의 풍경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며 자기 자랑과 사진 사랑이 고작 이동 거리와 비례한다고 떠들어 대던 그들은, 대체 지금도 500킬로를 달리며 일면 사진을 찍겠다고 다니지는 않는다. 사진은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분야이지 물리적인 스포츠가 아니다. 운동경기와 예술이 특별한 재능을 요구하지만 그 양상과 방식과 대하는 태도는 방법이 다르다. 스포츠처럼 등수를 매기려 했던 많은 사람들의 사진 예술관은 지금 이 책에 나오는 사진인 문과 관해 대비해 보면 얼마나 사진을 터무니없고 어처구니 없이 사진을 호도 시켜 버린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 두렵다. 그 책임이 바로, 사진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질 따름이고 단순한 흥미의 인구는 언젠가 줄어들기 마련이고, 사진의 소비층을 없애 버린 현상을 만들어 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문학이 아무리 불모지같이 황무지라고는 하나 일 년에 신춘문예에 투고하는 작품 수만 보더라도 사진보다는 낫다. 그런데 사진을 그렇게 찍어 대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야무야 한때의 사진에 대한 추억으로 전락한 사람들이 많았다. 유행은 변했고 다들 카메라를 잡을 때는 카메라 작동법이란 책이 나왔듯이,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게 되니 스마트폰으로 사진 잘 찍는 법이란 책이 나오기까지 한다. 사진이 겨우 작동법같은 사용설명서를 책으로 접한 그런 사진은 과연 잘 찍기야 하겠지만, 그 또한 역시 오래가지는 못하는 걸 너무나도 쉽게 예측되고도 남는다. 남들이 카메라 메고 자구촌 오지를 돌아 나니는 여행작가를 하니 너도나도 배낭에 커다란 카메라를 매고 돌아다니며 스쳐가는 피상적 풍경이 진실인 양 사진을 보여주기 바쁜 것도 유행이었다. 그래서 나온 여행 책이 얼마나 될 것인지 그것도 한때의 광풍처럼 번졌다. 인도를 가니 인도 여행이 유행이 되고 일본을 가니 일본 관광지의 풍경이 일면 사진이 되는 것도 그런 이유와 다를 바는 없었다. 낯선 풍경도 계속되면 익숙에 젖어 들게 되고 흔해 빠지게 되는 것도 인간의 심리적 지루함이 가져다주는 상수이다.  익숙한 것에서 자신의 낯선 시선은 찾기가 어려운 만큼 낯선 풍경의 새로움도 다들 그렇게 찾는다. 사진 한 장을 찍어도 그 한 장에 인문학적인 자신의 고뇌를 담겠다는 사진 철학적인 자세의 확립 없이, 일부 예술가들의 전유물처럼 소수에 국한될 뿐이고 그래서 사진 이력은 단명으로 그쳐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유행병처럼 흘러가버린 사진가들에게 무어라 할 말은 없다. 인간의 사유는 여전히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바다를 향할 뿐이고 멈추지 않는 지긋한 열정은 땅속에서 고요히 흐르는 지하수처럼 단비는 내리는 것이다. 한때의 유행이 지났다고 해서 슬퍼할 일은 아니다. 사람의 기호 식품으로 전락한 것도 수요는 늘 변하기 마련이라 사진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다만, 왜 사진으로 자신의 삶에 인문을 결합하고 나아가 자신의 삶에 사진을 통해서 사유의 자기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의 시간을 끊임없이 진행시켜 나가는 것. 사실 인문이란 결국 인간성의 문제로 귀결되는 분야가 아니겠는가. 인간다움의 이 다움이란 결국 자신이 속해버린 이 세계의 시선의 관조를 이루는 작업일 것이다. 사람의 고통과 즐거움과 기쁨과 슬픔의 본질을 추구하는 인간다움의 그 다움이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시선. 그게 우리는 보려 하는 과정이 사진이 매게가 된다면 도구란 좀 더 이용성을 높인다는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것. 이게 사진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한다. 삶이란 늘 유한하다. 유한성은 결국 유한적인 변화의 하나하나의 과정의 연결된 끝없는 사슬을 이루는 속에 내가 있다. 무언가 더 특별할 것도 없이 장구한 시간 속에서 일정 부분에 걸친 이 공간에서 잠시나마 머물고 또다시 그 어떤 물질로 분해되고 흩어져 가는 연속성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이 과정이 무위 무상 같은 삶의 유한적 의미를 찾는 것. 그럼으로써 지금 나와 나의 관계된 모든 것들의 정렬과 질서를 찾아가는 것. 진정 이 우주의 카오스가 어떤 작은 우연적 관계에서 필연이란 의미를 가질 때, 나의 존재적 본질을 사색하고 삶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사진이 사진의 보는 것으로써 그 임무를 다했다 해도 슬퍼할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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