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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키의 서재

나는 가끔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이유인 즉슨, 돌잔치 업체를 운영하는 동생이 아르바이트생을 구하지 못할 때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대형 연회장에서 동생과 함께 돌상 세팅을 끝내고, 돌잔치를 치를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액자 사진 속 부부는 삼십 대 중후반처럼 보였다. 이런 경우, 둘 다 직장에서 어느 정도 직책을 갖고 있거나, 한쪽이 전문직일 경우가 높다.(그냥 나의 생각)


드디어 아기를 안고 부부가 들어왔다. 아빠는 사진보다 더 큰 체격에 목소리도 우렁차고 호탕했다. 풍기는 모습과는 다르게 오자마자 아기 기저귀를 척척 갈고, 행사 전반에 대해 체크했다. 보통은 엄마가 돌상을 예약하고 꼼꼼하게 행사를 챙기는 경우가 많다.

전날 일로 제주도에 다녀온 엄마는 돌잔치고 뭐고 마사지를 받고 싶다는 둥, 남편이 없으면 돌잔치도 못 치뤘다는 둥 자신은 이런 복잡한 것엔 신경쓸 틈이 없는 사람인데, 이런 바쁜 와중에도 많은 손님들을 불러모아 돌잔치를 할 수 있는 건 다 '자상한 남편' 때문이란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남편 자랑이었다.


손님이 오시기전에 마지막으로 행사장을 둘러보시는 아버님. 죽 둘러보시다가 뒷자리에 뒤집어놓은 의자를 발견하시고는 이걸 이렇게 해놓으며 되냐며, 다들 자기일 아니라고 이렇게 일할거냐며 손수 의자를 똑바로 놓기 시작했다. 그 말이 화를 내거나 짜증이 아닌, 웬지 회사 과장님이 여직원들에게 핀잔 주면서, 솔선수범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연회장 직원이 할 일을 아버님은 자기 일처럼 아무렇지 않게 아주 편하게 하셨다.


우와~ 나도 이런 남편을 만나면 참 좋을 것 같았다. 부인에게 참 자상하고, 직장에선 아주 일 잘하고 성격좋은 과장님 포스가 풀풀 풍기는 그런 사람.

더욱이, 그 전에 함께 일한 상사가 극도로 책임감을 회피하는 사람이어서 질릴 대로 질려서 그런지 이 아버님 같은 상사와 함께 일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암튼, 그렇게 돌잔치는 시작됐고 문제는 뒷정리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생이 다른 돌잔치 행사 때문에 뒷정리를 나에게 맡긴 것. 돌잔치 하이라이트 돌잡이 이벤트가 다 끝나고 나는 돌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직 자리엔 많은 손님들이 있었지만, 나는 행사가 끝났다는 생각에 돌상을 정리해 버린 것이다. 그때, 갑자기 포토그래퍼가 다가오더니 가족사진도 안찍었는데 돌상을 치우냐고 했다. 그리고 아버님까지 오시더니 원래 이렇게 가족사진도 안 찍고 돌상을 치우냐고 하셨다. 몹시 당황한 나는 돌상을 다시 차릴까요....라며 어쩔 줄을 몰랐다.

당황한 내 모습을 봤는지 아버님은 "자 그럼 이렇게 합시다. 그럼 이미 돌상을 치웠으니 어쩔 수 없으니 현수막만 잘 정리해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컴플레인이 들어왔을 수도 있었지만, 아버님은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바로 상황을 정리하셨다.


역시, 멋진 아버님이셨다. 난 다시 한번, 멋진 과장님의 모습을 봐 버렸다.

위기 상황에서 후배들이 어쩔 줄 모를 때, 재빠르게 플랜B를 꺼내 위기를 넘기는 리더십과 능력을 소유한 과장님....정말 어느 여자 후배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랴~


사실 우리 주변에, 사회에 이런 멋진 과장님은 보기 쉽지 않다. 지난 한해 우리가 세월호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으며, 대통령을 포함한 사회 리더들에게 바랐던 건 위기 상황에서 남탓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사건 속에 뛰어들어 시기적절하게 플랜B를 꺼내드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세월호는 멋진 리더가 없었고 골든타임을 놓친 채 가라앉아야 했다.


한때 리더십과 관련된 다양한 책이 나온 적이 있었다. 카리스마형 리더십, 부드러운 리더십 등등. 암튼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리더는 어떤 상황에서도 책임 회피 하지 않고, 아랫사람이 식은땀을 흘릴 때 망설이지 않고 플랜B를 꺼내드는 사람이다. 물론 거기서 성격 파탄에 까칠하면 안 된다. 호탕하게 잘 웃는 마음 너그러운 사람.


글을 쓰고 보니 나도 이제 선배의 자리다.

그런데 난 플랜B를 멋있게 꺼내드는 선배였을까...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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