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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B님의 서재
  • 영의 자리
  • 고민실
  • 12,600원 (10%700)
  • 2022-04-13
  • : 116

고학력, 고스펙이 그리 낯설지 않게 된 오늘날엔 모두가 나름의 최선을 다한다. 게으른 게 죄인 것처럼 눈치를 주는 압박 속에서 어쩌면 모두는 살아가기보다 못내 살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피할 수 없던 강제를 벗어나 학‘생’, 취준‘생’의 삶을 지나고 이젠 그 ‘생’마저 희미해진 채 백수로 남은 이들. 거듭되는 실패와 낙오로 자신의 존재가 흐릿함을 체감한 이들. 끝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게 된 2030 청년 백수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약 66만 명을 훨씬 넘어버렸다. 1에 다가가고자 아등바등 노력했지만 결국 0에 더 가까워지기만 한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은 그렇게 희미해져만 가고 있다. 이제 세상은 수많은 유령이 살아내고 있는 곳이 되었다.

 


0에서 1로 변모하는 과정은 설레면서 우울하다. 곧 1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므로 0에 가까운 자신을 체감하게 된다. 첫 출근 날에는 0.0000001쯤 되는 기분이었다. (p.34)

 


201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고민실 작가의 첫 장편소설 《영의 자리》는 이렇듯 ‘0(영)’에 한없이 가까워지다 유‘령’이 되고 만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흐릿한 유령이 되어 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누구만큼이나 치열하게 생을 분투하고 있다. 작품은 0도 얼마든지 무한한 가능성을 내보일 수 있음을, 1을 넘어 더 큰 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며 세상의 모든 유령에게 위령제를 올려주듯 위로와 공감을 전한다.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을 전부 무너뜨린 경험이 나에게도 있었다. 숨 쉬는 법을 모르던 물고기는 숨 쉬는 법을 잊은 물고기가 되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거대했다. 끝났다거나, 실패했다거나, 돌이킬 수 없다는 말보다는 유령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p.146)

 


“유령이 또 왔네.”


1장은 20대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무엇이든 되어야 한다는 위기감에 젖은 이름 없는 주인공의 희망적이지 못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딱히 게을렀던 것도 아니었지만 실업을 겪을 거라곤 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생’을 박탈당하고 일상, 사건, 존재, 모든 게 어렴풋한 삶 속에서 약국의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는 주인공은 그렇게 덤덤히 유령이 된다.

 

그러나 영의 사람들도 하염없이 흐릿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작품은 2장을 통해 보여준다. 약국을 그만두고, 새로운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면접을 보고, 커뮤니티 사람들과 함께 주말 집회에 참석하는 주인공. 유령이기만 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1에 한참 미치지 못했던 작은 존재들도 흐릿한 픽셀 하나가 가득 채운 모니터처럼 함께 모이면 거대한 수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담아낸다.

 


0은 다른 숫자 뒤에 채워 넣기만 하면 얼마든지 큰 수를 표기할 수 있다. 어쩌면 인도에서는 신의 무한한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0을 발명했는지도 모른다. (p.233)

 


한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과열된 경쟁 속에서 숫자 1을 향하는 것은 당연한 목표가 되었고, 그렇게 1에 닿지 못한 수많은 0의 사람들은 끝내 유령이 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1이 되지 못했다고 좌절하며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세상은 의외로 1의 사람들에 의해서 보다 수많은 0의 사람들 합으로 열심히 굴러간다. 지금의 어렴풋한 시기도 생의 여정 속 하나의 지점이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0에 가까운 생도 조급해하지 말고 차근히 거치다 보면 어느덧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혹시, 유령이신가? 그렇다면 이 책으로 위령 받고 다시금 나아갈 힘을 얻게 되길.



*본 게시글은 한겨레출판의 서포터즈 활동으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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