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최근 내가 읽었던 작품 중 꽤나 여운이 오래가는 작품인 듯 싶다. 그렇게
말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아름답고 담백한 문장으로 술술 읽히는 페이지터너 요소도 좋지만, 열네 살 소녀 린다 라는 캐릭터가 발산하는 느낌과 린다가 맞닿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성찰하게 되는, 삶의 성장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서사의 깊은 여운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작품 곳곳에 숨겨져 있는 무수히
많은 상징들이 스토리에 잘 녹여져 있어서 열네 살 린다 라는 캐릭터가 가진 결핍, 갈망과 맞물려
정교하게 잘 구축된 느낌이 든다.
이야기는 린다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첫 문장을 따라가며, ‘네 살 소년 폴은
어떻게 죽게 되는지’, ‘폴의 죽음에 린다가 과연 책임은 없는 것인지’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하며, 마침내 린다가 폴의 죽음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을 때 (!) 린다의 심장이 멎는 것처럼, 읽고
있는 나 역시도 심장이 멎을 거 같은 그런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 느낌은 문자로 표출되어지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마음의 깊은 곳을 찌르는 그런 느낌이었다. 어떤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마음 속의 깊은 구덩이에
뺘저버린 느낌이라고 할까.
첫 장의 이야기 구축은 마치 잘 짜여진 단편소설의 느낌으로 초반부터 시선을 잡아 끈다. 러시아
짜르를 들먹이던 교사가 갑작스럽게 죽고 새로 부임한 그리어슨 교사가 학생들을 대하는 과정, 그리고, 그리어슨이 동급생 릴리에게 시선을 두는 모습을 관찰하는 린다를 묘사하면서 작가는 린다가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노출한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에서 은유하듯 마치 먹이감을 찾고 있는
늑대의 그것과도 같다.
“나는 그의 눈길이 릴리
홀번에게 가서 멎는 것을 보았다. 릴리는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에 추운 날씨인데도 진홍색
스웨터만 입고 있었다. 그는 릴리의 미모가 자기를 구해줄 거라고, 우리 중에서 제일 예쁘니까 아마 친절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18p)
실제 이름은 매들린, 매티 이나, 학교와
주변에서 “린다, 괴짜, 빨갱이”라 불리우는 린다 그 소녀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린다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며, 사춘기의 통과의례 같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작가는 린다 그녀가 어떻게 불리는 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듯 하다.
그것은 열네 살 소녀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지점 이었다. 아마도 가정에서, 학교에서, 혹은 다른 곳에서 불려진다는 건,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한 ‘정체성의 혼란’을 의미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이름에 따라 그녀가 행하게 될 일들에 대해 (앞으로
벌어질, 혹은 그녀의 혼란한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 일 수도 있다.
“… “아, 매티야.” 아무도 나를 그렇게 부른 적은 없었다. 마치 뒤에서 누가 어깨를 툭 친 것 같았다. 내
이름은 매들린이었지만 학교에서는 린다 아니면 빨갱이나 괴짜로 불렸다. 나는 소매 속에서 손을
말아 쥐었다…”(21p)
성인이 된 그녀를 남자친구는 또 다른 애칭으로 부르기도 하며
“…“계속해봐, 걸스카우트. 무의식
속에 다 처넣어 봐.”
“그리고 개들도 잡아먹지! 알래스카 어딘가 이름 모를 곳에 작은 마을이 있었어 — ” (252p)
그리고, 린다는 ‘이름’이라는 ‘정의 내리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드러낸다. 이것은
아마도 린다 그녀의 정체성이 아직 확립되지 못했으며, 그녀가 자신의 존재론적인 지점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내비치는 메타포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을 붙이는 것-정의되는 것을 통해서 사물과 인물은 그것의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이 이 세계에서 존재적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 외지인들은 시골 사람들은 으레 다 정이 많을 거라 믿어 버리고 아무나 다 이름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 식료품점 주인 코호넌 씨 — 평생을 매일같이 다림질한 격자무늬 셔츠를 입은 — 를 에드라고 불렀다. 식당에서 샌타 애나는 애니, 앤, 그도 아니면 자기라고 불렀다. 그들은 나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짐의 딸 아닌가, 다 컸네!” 은행에서
개설한 예금 계좌에 돈을 맡기고 있을 때 나한테 다가오거나, 배낭을 메고 길을 걸어갈 때 나에게
손을 흔들면서 그렇게 말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나,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 아빠가 여름 일거리로
가이드 일을 자주 하던 시절 나를 두어 번 보았을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그들은 실은
거위나 확실하게 복제본 표시가 있는 새들처럼, 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 의미 없는 존재들
일 뿐이었는데. 내가 그들에게 그토록 특별하고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그토록 뚜렷이 구별되다니.”(120~121p)
그것은 이후 친교를 나뉘게
되는 새로운 이웃 젊은 부인 패트라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레오를 만나고서 이름을
바꾸었어. 레오랑 클레오라고 하면 이상하잖아?” (133p)
패트라 그녀는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이름이 바뀌었다. 그렇게 ‘이름’이라는 것이 그들의
존재론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작가는 “이름”이라는 메타포를 통해서 그들의 존재론적인 불안성과 갈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린다는 어쩌면, 자신이 하나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그때를 스스로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쩌면 한 명의 어른으로서 더 이상 혼란의 시기를
벗어버리고, 스스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토대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스토리텔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열네 살 소녀가 겪는 학교에서의 일들. 릴리와
그리어슨 씨의 수상한 관계, 그리어슨 씨에 대해서 린다가 행하는 행위들. 그 과정에서 맞닿게 되는 복잡미묘한 린다의 상황들. 그런
시간들을 재료 삼아 삶의 한 시기를 건너고 있는 린다의 그 모습은 마치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스밀라가 떠올려진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Detective/mystery적인 서사를 취하고 있는데 (사건의 발생à 원인 규명à 드러나는 진실) 그것은
사회적으로 고립된/결핍된 캐릭터가 자신의 울타리에 있던 인물의 부재,상실을
겪고 그 상황의 진실을 추적해내가는 지점에서 그러하다. “얼음과 눈”에 대해 예민하리만치
천착하는 스밀라가 추락한 어린 소년의 죽음을 뒤따라가는 것 처럼, “소속/관계”에 천착하는 린다는 자신이 돌봤던 아이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찾기 위해서 시 공간을 넘나들며 뒤따라간다. 린다가 천착하는 소속/관계. 그것은 울타리다. 그것은 어쩌면, 사춘기라는 생물학적 연령, 사회적으로 고립된 곳에서
키워줬다는 사회적 결핍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 초반에 폴의 죽음이 알려지며, 나쁜 일이 일어날 거라고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그
과정에서 열네 살 소녀 린다가 어떤 마음의 반향을 얻게 되는지 계속 책을 파고들게 만든다.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분명 죄책감과 도덕성의 문제, 열네
살 소녀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탁월한
방식으로 이것들을 연결시키고 있다.
이런 전개방식은 커다란 사건이 중심이 되는 단선적인 줄거리와 전형적이고, 표준화된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가 덜 할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미네소타 북부의 전직 히피족인 부모(?)와 비정상적인 친구와 이웃들과 함께 성장하며 겪게 되는 여러 일들을 통해서 린다가 혼란과 불안을 드러내는
모습은 마치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의 쌍둥이 형제 클라우스와
루카스가 내지르는 행위의 면면과 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이 전쟁 중에 일어난 잔혹한 현실 앞에 직면한 쌍둥이 두 형제가 제멋대로(?), 욕구에 따라 좌충우돌하며 정체성을 쌓아가게 되는 놀라운 이야기라고 한다면, <늑대의 역사>의 린다는 사춘기의 평범치 않은 시기 속에서
일탈과 방황의 끝을 드러내며 스스로의 정체성 혼란과 각성을 하게 되는 것이 닿아 있지 않나 싶다.
<늑대의 역사> 는
삶의 모순과 의문들로 가득차 있는 이 세계를 건너가는 열네 살 소녀의 혼란한 정체성과 불안을
린다 그녀가 직면하게 되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잘 녹여낸 듯 싶다.
이 소설의 특성이 장르적이냐, 순문학적이냐, 성장소설이냐, 스릴러 소설이냐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을 듯 싶은데, 본질이 되는 것은 결국 이 세계를 맞닿고 있는 인물의 내면과 외면의 묘사가
일회적으로 소비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읽는 이에게 어떤 질문과 성찰을 던져주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은 ‘문학적으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것을 문학스릴러라고 불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직선적인 스토리를 좋아하는 누군가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 이동을 오가며 린다의 행적을 뒤쫓는 것이 성가시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오히려 이 작품의 특성을 놓고 볼 때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것'은 성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린다가 그것의 극복을 위해서 과거 폴의 죽음에 대한 스스로의 성찰을 불러오게 하는 중요한 장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 리뷰에서 소설의 끝, 이 소설의 음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읽지 않은 이들이 스스로가 이 이야기가 지닌 대단한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이야기의 서늘하면서도 긴장감어린 문장을 뒤따라가며, 차츰 이야기가 고조되어 마침내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그
감정의 여운을 직접 느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생각할 것이 많은 듯 하다. 그것은 곧 내게 있어 오랫동안
기억될 책이 될 거란 뜻이다. <늑대의 역사>는 한번 읽고 리뷰를 쓰기엔 이 작품의 전체 주제 의식과 질문들을 이해하기엔 부족할 지 모르겠다. 아마도 다시 읽을 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