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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 노재희
  • 12,600원 (10%700)
  • 2023-11-01
  • : 160

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정처 없음’을 살아내고 있는 노재희 작가의 산문집이다. 여느 산문집처럼 작가의 인생이야기, 경험, 생각, 느낌, 여러 에피소드들을 독자들과 공유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노재희 작가만의 특별한 감수성에 흠뻑 빠져드는 울림이 있었다. 삶과 기억, 죽음과 질병, 종교와 무신론의 문제, 글쓰기와 읽기 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즐거웠다. 


그 중에서도 문자공화국이란 키워드가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소리보다 문자에 반응하며 오랫동안 문자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의 시민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나도 이 책을 읽고 저자의 문자공화국으로 귀화하고 싶었다. 이 공화국의 시민은 공화국이라는 말의 의미 그대로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각자 자신의 의사대로 문자의 세계를 살아간다. 이 공화국에는 국경도 없고 입국 심사 같은 것도 없다. 단지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좋아하기만 하면 이곳의 시민이 될 수 있다.


또한 책 제목이기도 한 ‘나무와 함께 정처없음’이란 챕터가 큰 여움을 남긴다. 

나무와 함께 여기저기 옮겨 다니던 우리랑 좀 비슷한 데가 있었다. 나무를 키우면서도 한군데 정착하지 못했지만 이제 나무들을 땅에 심고 나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무렵, 여름씨 지인의 농장 이전 소식을 들었다. 나무는 어쩌고? 놀란 나의 물음에 여름씨는 너무 쉽게 대답했다. 파서 옮겨 심으면 되지. 그럼 우리도 언젠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나무를 파서 또 어딘가로 옮겨갈 수도 있다는 거네? 나는 좀 싱겁게 웃었다. 나무를 심는다고 정착이 되는 건 아니었구나.


노재희는 서른세 살 여름에 결핵성 뇌수막염이라는 “죽을 뻔한 병”에 걸렸다. 치사율은 50퍼센트, 정확히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었다. 살아남더라도 대부분 예후가 좋지 않아 청각 장애, 시각 장애, 인지 장애 등이 남을 수 있었던 상황. 당시 저자는 40여 일을 병상에 누워 지냈고, 20여 일간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기억 회로 전체가 꼬인 듯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이후로 그의 인생은 아프기 전과 후로 나뉘게 된다. 저자는 말한다. 병원에 있던 40여 일간은 “아주 커다랗고 기괴한 징검다리”였다고. 그걸 딛고 다른 세계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어느 날 새벽 평소보다 체온이 1.5도 높아져서 응급실에 갔을 뿐인데, 당시 모든 일상이 중단되었다는 그는 갑작스레 찾아온 뇌수막염으로 인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짧고도 긴 과정을 통해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탐색해간다.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도 손에 꼽는 소설인 ‘솔라리스’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읽은 것은 생각나지만 그 고립된 행성에서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갔다는 것 말고는 소설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도 않았다는 얘기에 격하게 공감했다. 


기억들은 가물가물 깜박이다 어딘가로 사라져 숨어버리거나 기억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시간에 휩쓸려 희미해지는 것 말고도 무언가가 우리 기억을 단박에 앗아 가는 일도 있다. 오래전에 읽은 책 내용이나 오래 만나지 못한 누군가의 이름 같은 것이 아니라, 나를 당신을 잊기도 한다는 것은 신비롭고도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잊혀져 완전히 사라지기도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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