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육의 문제는 상식이 되었다. 학교는 다수의 학생들에게 의미도, 전망도, 준비도 제공하지 못한다. 학교 제도에의 반항을 통해 학생들이 자기 주관을 갖게끔 하지도 못한다. 즐거운 공간도 아니다. 엄기호는 학교에 대한 사람들의 분개와 비판에서, 이들이 갖는 학교에 대한 기대를 읽는다. 엄기호는 학교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한다. 실용적인 지식 습득의 장, 비판적 계몽의 기구, 사회적 신분 상승의 사다리, 그리고 감춰진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는 곳. 문제는 이들 중 어느 것도 지금의 학교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가르치는 지식은 미디어에서 우리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낙후되었으며, 비판적인 정신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사람을 국가와 시장에 종속시키기만 하며, 중산층 이상이 자신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도구로서 작동하며, 감춰진 재능은 발견되고 계발되기보다는 무시되고 억압 받는 곳이 학교다(pp.22-25).
엄기호는 대학 강의에서 “군대를 다녀와서 성장했다”고 말하는 학생들의 일화를 언급한다(200명의 학생 중에서 학교에서 자신이 성장했다고 말한 학생은 두 명뿐이었다). 다양성, 차이, 공존을 배울 수 있던 공간--천차만별로 이질적인 개인들이 뒤섞이는 공간이 군대이므로--이 군대였다는 것이다. 오히려 군대보다도 지금의 고등학교가 더 동질적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한 반에 잘사는 학생과 못사는 학생, 성적이 좋은 학생과 나쁜 학생이 모여 있지만, 고등학교에 가면서부터는 각각 동질적인 집단끼리 격리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성장이 자기 주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과 함께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할 때, 다름/타자성이란 성장에 필수적이다(p.27). 타자를 만나지 않는 공간에서 성장이란 불가능하다.
타자성과 단절된 채 동질성만 추구하는 것은 학생들만이 아니다. 학생과 학생, 교사와 교수,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등 일체의 관계가 동질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로에 대한 관례적인 무관심을 넘어 개입하고자 할 때, 각각의 관계는 갈등과 파국을 겪는다. 관심 갖는 영역, 그리고 의견이 다른 것은 서로 간의 ‘취향’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토론하고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 서로 건드리지 말고 존중해야 하는 것이 된다. 교사는 우등생들이 택한 입시 전략을 존중하여 그들의 이해관계에 별반 득이 되지 않을 교육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 ‘수포자(수능포기자)’들이 수업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을 방관해야 한다. 인문학 교육을 강조하는 교사들은 다른 교사들에게까지 자신들의 교육론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학부모와 교사, 학생의 관계는 정해진 형태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지금의 교육 현실을 바꾸려는 의욕적인 교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지역의 대학과 연결하여 학생들을 위한 강좌를 만들기도 하고, 외부 강사를 초대해 학생들과 만나는 자리를 만든다. 이들은 학교의 업무--관례적이고 행정 편의적인--에 대해서는 소극적이며, 승진을 포기하더라도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참교육’을 실천하려 한다. 그러나 그들 또한 역설적으로 딜레마적 상황에 처해 있다. 그들의 교육론을 불편하게 여기는 동료 교사들에 의해 그들은 고립된다. 다른 한편, 학생들과의 관계도 안정적이지 않다. 그들의 ‘참교육’과 학생들의 입시가 언제나 이해가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교육적 만남’--‘성장을 위해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만남’--이 점차 불가능한 것이 되고 있다는 증언이다. 교육적 만남이 회피되고, 자기 단속의 문화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 교실 속의 두 세계」에서 엄기호는 수능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 그리고 ‘수포자’인 학생들 사이의 두 세계를 묘사한다. 고등학교에 한정할 때, 수업 붕괴는 구도심, 일반 공립고, 인문계, 남학생 학급에서 두드러진다. 수업 붕괴에 대한 교사들의 감정과 경험도 자신이 어떤 학교에서 가르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수포자들은 자신이 공부해야 할 동기과 목적 의식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수업을 거부하고 방해한다. 거칠게 묘사한다면 두 세계를 위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포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까닭이 있음을 엄훈(2012)을 인용하며 엄기호는 지적한다. 수능에 맞추어진 진도에 ‘수포자’들이나 수업 내용을 따라갈 수 없는 학생들은 따라갈 수 없고, 자신들이 따라갈 수 없는 수업은 그들에게 고통이 된다. 이들 학생들을 “학교 속의 문맹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현재의 학교 제도는 이들의 문맹을 학습 부진의 문제로 보고, 문제의 원인이 이들의 게으름이나 태도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학생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상황은 정반대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모른다고 말하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 자신이 대체로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사용하는 말하기’를 자연스럽게 익혔으며, 그것을 당연시하여 전하는 데 익숙한 것이 교사들이다(pp.51-52).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개별적이고 친밀한 상호작용”(엄훈, 2012:396)이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개별적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목고나 소위 명문고가 아닌, 일반적인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이러한 관계의 형성은 불가능하다(그러나 학생들과 눈 맞추며 접점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교사들이 있고, 그들의 시도는 유의미하다). 한편, 이들 ‘널브러진 애들’이 아닌 ‘공부하는 애들’은 어떤가? 공부하는 애들도, 다른 의미에서, 수업 붕괴를 겪는다. 그들에게는 대학 진학이 가장 큰 목표이며 수업은 입시를 위한 도구일 뿐이므로, 그들이 수업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는 전략적으로 결정된다. 입시를 준비하는 그들에게 수업에 집중하길 요구할 수 없다. 현재의 입시 체제에서, 학교는 오히려 학원을 비롯한 사교육의 보조역을 맡곤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분노와 학교 폭력」에서 엄기호는 수업 붕괴 못지 않게 오늘날 학교의 위기로 자리 잡고 있는 학교 폭력의 문제를 다룬다. 학교 폭력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현재의 학교 폭력에서 특징적인 것은 학교 자체가 ‘왕따’에서부터 ‘관리자’에 이르기까지 성별, 나이, 경제 등에 따라 위계화되어 있고, 학생들도 신분제적으로 위계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위계에 따른 신분적 폭력이 존재한다. 이렇게 될 때, 강자들은 약자들에 대해 아무런 감정적 결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신분이 다른 셈이기 때문이다. 주류인 학생들은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하는 학생들이고, 비주류는 대개 공부도 운동도 못하며 직책도 없는 학생들이다. 주류인 학생들은 반의 분위기를 이끌며, 교사는 이들을 통제하지 못한다. 반면 비주류인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뭉치지 못한다. 섬바디와 노바디가 구분되는 신분주의다(p.80). 섬바디가 노바디를 괴롭히며 빈번히 언급하는 것이 ‘장난’이라는 말이다. 장난이라는 말에는 타자가 상처받을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없다. 그런 점에서 섬바디와 노바디 사이에는 다름/타자성이 배제된 셈이다. 다름/타자성의 배제는 교사 또한 갖게 되는 문제다. 교사와 학생’이 접점을 찾을 지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서로에 대한 개입은 강한 갈등을 야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상담’은 더 이상 학생과 교사가 서로의 다름을 직면하고 이해하는 기회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집약적이고 집중적으로 야단맞는” 시간으로 학생들에게 받아들여진다(p.100). 또는, 상담은 교사가 학생의 내밀한 이야기를 접했을 때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학교 폭력과 그것으로 인한 학생들의 돌출 행동(자살 등)이 발생함에 따라, 교사들은 학생들의 정서를 파악하고 감시하는 관리자가 되었다. 이전의 상담이 교육, 성장 혹은 훈육과 관계된 것이었다면, 이제 상담은 돌출 행동의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 학생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통치술이 되었다. 학교 폭력 그 자체도 문제지만, 학교 폭력이 문제로 떠오르며 학교는 ‘육체적 생명’을 돌보는 공간으로 전환되고 있다. 학생들의 생명은 정치적 생명에서 육체적 생명으로 축소되며, 사회적・정치적으로 축소된다.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서도 문제가 생겨난다. 학생의 성장을 위해 교사와 학부모가 협력해야 하겠지만, 실제로 그들 사이에는 긴장과 갈등이 흐른다. 학부모가 자녀의 진로와 성적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질수록 교사는 학부모의 동반자이기보다는 관리 대상이 된다. 만약 교사와 학부모가 학생의 진로에 대해 갖는 생각이 다를 경우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문과냐 이과냐, 예체능이냐 입시냐? 교사와 학부모가 의견 차이를 갖게 될 여지는 다양하다. 그러나 문제는 둘 사이의 의견 차이가 생산적이기보다는, 요컨대 서로의 다름에 대해 열린 관계를 야기하기보다는, 폐쇄적인 경계의 관계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학부모는 자식의 역량이 부정당하는 것, 자신의 교육 방식이 비판받는 것을 경계한다.
심지어 교무실의 교사들끼리도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교사는 학생들과의 관계를 일차적으로 가지므로, 업무에 있어서 동료 교사와의 관계는 부수적이기 쉽다. 교사들은 제각각 혼자 바쁘기 쉽다. 게다가 학교는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으므로, 교사들은 장기적 목표를 가지고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데 급급해진다. 학생과 상담하는 것도 업무 외의 시간으로 빼두어야 하는 상황이다. 전교조를 비롯한 기존의 조직들도 예전 같지 않아서, ‘벌떡교사’가 이제 사라져가고 있다. 예전 세대와 새로운 세대 사이의 담도 높아지고 있다. 기간제 교사와 정규직 교사 사이의 관계도 복잡하여, 과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거부하는 것이 저항이었던 반면, 이제 이 복잡한 맥락에서는 그 행위는 기간제 교사에게 일을 떠넘기는 태업이 되고 만다.
책에서 중요하게 읽은 것은 오늘날의 학교에 대한 위와 같은 총체적인 분석과 진단이다. 일종의 현실적인 제언으로서 우선 함께 자리를 마주하고 문제를 문제로서 직시하고 이야기 나눌 것이 제시되고 있으나,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제언은 여전히 막연하게 느껴진다. 첫째, 우리가 함께 자리를 마주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둘째,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로부터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꼭 필요한 제언이지만 여전히 막연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이 두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어떻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애초에 실질적인 제언 이전에 오늘날의 학교에 대한 이해를 위해 쓰여진 책이므로, 남은 것은 우리가 함께 고민할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