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논술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처럼 그것에 의해 직접적으로 진로에 영향을 크게 받는 때는 없었던 것 같다. 대학교 입시 시험에서 논술이 부각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제는 창의적 논술, 실천적 논술 등 그 안에서 변별점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통합 논술도 그 일환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학교 수업에서도 논술의 중요성은 인문계열이나 이공계열을 구분할 것 없이 점차 커지고 있으며, 기업들 또한 아이디어 창안과 마케팅 등에 있어서 글쓰기와 토론 문화를 적용하는 폭을 넓히는 추세다. 이런 사정으로 오늘도 서점가에는 무수한 논술 서적이 새로 찍어져나오고, 논술학원과 과외 첨삭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 열풍 속의 글쓰기를 실용적 글쓰기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까. 여기서 무관하게 있기란 쉽지 않은 듯 여겨진다.
아마도 상당수의 독자도 이런 논술의 중요성을 마음 속에 새기면서 책을 집어들게 것이다. 자신의 실용적 글쓰기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종의 방법론에 대한 기대를 품고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이 그러한 기대에 즉각 부응하리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객관적인 사고”나 “명료한 사고”에 관한 책이 아니다. 필자가 알기로도 이런 문제를 다룬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으며, 그 가운데는 상당히 유용한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책들도 있다. 이런 책들은 선입관을 갖거나, 오류를 범하거나, 논리적 연관성이 없는 것을 끌어들이거나, 사실을 확인하지 않거나, 생각의 방향이 잘못되면, 어떤 위험이 생기는지 보여주고 설명함으로써 독자에게 자신의 편견과 비합리성을 깨닫도록 도와준다.(p.9)
몇 개의 예시문을 토대로 질문이 의도하는 답변을 신속하게 이끌어내고, 그것을 서론과 본론과 결론의 삼단 형식으로 원고지 지면에 영역을 배분하고,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로 풀어내는 논술의 순결한 방법론을 기대했던 독자라면 머리말 첫문장에서 존 월슨이 피력하고 있는 바에 의아함을 느낄 것이다. 객관적인 사고와 명료한 사고를 떠나서 논리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여기에는 출판사 이제이북스의 책임이 얼마간 따른다. ‘Thinking With Concepts’라는 원제가 어떻게 ‘논리내공’으로 번역될 수 있는가에는 의문이 따른다. 창의성을 좀 과하게 발휘하지 않았는가 하는 비판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상단에 자그맣게 병기된 '개념을 잡아라!'만으로는 충분치 않아보인다. 논술 시험을 대비해 책을 구매하는 독자에게 공연한 낚시질을 일삼게 된 꼴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책을 덮는 것은 불공정해보인다. 이 책이 개념에 관한 책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객관적인 사고나 명료한 사고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알고 있던 객관적인 사고, 명료한 사고는 무엇인가? 그것들과 개념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가? 존 월슨이 피력하는 변별점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면, 책 속에서 실용적 글쓰기를 위한 순결한 논술의 방법론을 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싶어하는, 그러므로 앞서의 사소한 의문들을 간과하지 않고 싶어하는 독자라면, 여기서 책을 서가에 도로 꽂기 전에 좀더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객관적인 사고”라는 것은 너무 광범위하고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주제를 가르치는 데 사용된 방법들은 이질적인 것들을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것들일 수밖에 없기에, 이런 책들은 그 사용이 한정되어 있다. 그리하여 독자는 이런 책들을 읽고 나서 이성과 언어의 중요성을 한층 더 분명하게 개닫게 되지만, 이런 책들은 독자에게 독자 스스로가 광범위한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일관성 있는 사고의 기술은 전해주지 못한다.
(…) 나는 이 사고의 기술이 특정한 방식으로 개념을 다루고 규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에, 이를 “개념 분석(the analysis of concept)”이라 명명하였다. 이 기술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많은 중요하고 흥미로운 질문들에 답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세부적이명서 적확한 방법을 제시해 준다.(p.9-10)
요컨대 존 월슨은 좀더 근본적인 입장을 취한다. 지난 세기 초엽의 영미 분석철학에서 유래한 언어게임의 관점을 갖고서, 개념의 쓰임과 맥락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언어로 구현되는 개념에 대해서는 기존의 것을 그대로 전제하면서 그것들을 논리에 따라서 일정한 인과관계로 엮어내는 것에 만족하는 일반적인 논술의 입장과는 다르게, 존 월슨이 주장하는 개념 분석의 입장은 그 전제된 개념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고래가 1만 5천 톤짜리 화물선을 침몰시킬 수 있는가?”와 “고래는 물고기인가?”는 다른 질문이다. 첫째 질문은 사실에 관한 질문으로써, 정보를 취합하여 이 질문에 관련된 특정한 사실을 찾아내기만 하면 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둘째 질문은 첫째 질문과는 구분된다. 여기에서는 “물고기란 어떤 개념인가?”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개념에 관한 질문은 가치에 관한 질문과도 다르다. “공산주의는 전 세계에 퍼질 것인가?”와 “공산주의는 바람직한 체제인가?”, 그리고 “공산주의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가?”의 세 가지 질문을 살펴보자. 첫째 질문은 사실에 관한 질문이다. 반면 둘째 질문은 공산주의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답이 결정되는 질문이다. 그리고 셋째 질문이 개념에 관한 질문이다. 공산주의라는 개념과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양립하는 지점과 대립하는 지점을 살펴보면서 개념을 규정짓기에 따라 답이 결정되는 질문이다.
존 월슨은 다른 무엇보다도 바로 이 개념에 관한 질문을 대하는 태도를 강조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개념들을 진지하게 재검토할 것, 각 단어의 의미를 의식하면서 사용할 것.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써 복합적인 질문에서 개념을 분리할 것, 한 개념의 일차적 사용과 확대 파생된 사용을 구별할 것, 전형적 사례를 살펴볼 것, 반대 사례를 상정해볼 것, 개념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전체 개념 체제 속에서 개념을 파악할 것, 결정하기 어려운 사례를 상상해볼 것, 가상의 사례를 설정해볼 것, 사회적 맥락을 염두에 둘 것, 기저에 깔린 불안감을 고려할 것, 현실적 결과를 다져볼 것, 언어 차원의 결과를 예측해볼 것의 열한 가지를 제시한다.
또한 질문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언어적인 함정으로써, 추상적 대상이 실재한다는 믿음, 사실적 의미와 가치의 혼동, 보이지 않는 함축, 항진 명제의 유혹, 의미의 지나친 확장, 요술과 실재의 혼동의 여섯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존 월슨은 통념적인 관점에서의 실용적 글쓰기와는 거리를 두고 있으며, 제목에 혹해 책을 집어든 독자에게는 어쩌면 ‘낚였다’라는 평을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존 월슨의 태도는 소통의 문제에 대해 성실한 자세로 대답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진정으로 실용적인 것일지 모른다.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있어 막연한 개념을 사용하여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것에 반해, 그 개념을 엄밀하게 분석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소통을 하고자 하는 태도에서는 도덕철학자다운 구도자적인 일면도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은 생각의 실이 엉켜있거나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어 머리가 텅 비어 있는 듯 여겨졌을 때 종종 출발점이 되주었다. 대학교에 갓 입학하여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때, 휴학하고서 혼자 시간제 근무를 전전하며 고되게 돈을 벌었을 때, 군대에서 제대했을 때, 이따금 생각나서 책을 펼칠 때, 내 흐트러졌던 관점을 다시 되짚을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내가 여전히 이 책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이 많고 많은 논술 서적 중의 한 권 정도로 치부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제목에 혹해 책을 펼쳤다가 구석에 쳐박아두는 독자가 있다면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머리말로 돌아와서 존 월슨의 고백으로 글을 마무리 짓기로 하자. 사유마저 물신적인 그 무엇으로 여겨지는 이때에, 한 번쯤 책을 펼쳐 끝까지 읽어보는 것은 어떨지.
저학년 학생들이 이 기술들을 배운다면, 그들은 이 시기를 막연하게 지내면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환경 속에서 특정 과목을 공부하기에 여념이 없는 학생들과 교사들에게는 아무런 목적 없이 우왕좌왕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런 시기로 보내지 않고, 분명 보다 나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좀더 솔직히 말해, 종교, 정치, 도덕, 사회과학, 자연과학, 나아가 개인적인 인간관계 등 일반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중요한 문제에 관심이 있는 많은 성인들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한 개념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데보다 개념 분석을 배우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면, 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