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브로델의 주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저술계획서 겸 요약이라고 해둘 수 있는 책으로, 1976년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의 강연을 글로 옮긴 것이다. 강의는 크게 셋으로 나뉘는데, 차례로 「물질생활과 경제생활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교환의 세계」, 그리고 「세계의 시간」이 그 제목이다.
「물질생활과 경제생활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에서 브로델은 하부구조로서의 ‘물질생활’(vie matérielle), 그리고 물질생활로부터 나타나는 ‘경제생활’(vie économique)을 구분한다. 브로델은 경제생활을 ‘시장경제’(économie de marché)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나중에 있을 ‘자본주의’(capitalisme)와는 다른 것이다.
물질생활은 인구, 식품들, 기술, 화폐와 도시 등으로 구성된다. 습관적인 것으로서 물질생활은 인간의 삶 전체에 스며든다. 여기서 점차 교환 경제가 나타나고, 시장경제가 조직된다. 생산을 조직하고 소비의 방향을 유도하고 통제하는 수준으로 시장경제는 확장된다. 시장의 바깥에 머무는 것들은 사용가치만을 지닐 뿐이지만, 시장경제에 이른 것들은 교환가치를 획득하게 된다. 시장경제는 시장, 상점, 행상들로 구성되는 낮은 차원, 그리고 정기시와 거래소로 구성되는 높은 차원으로 이어진다.
「교환의 세계」에서 브로델은 시장이 전체적인 것이 아니며, 부분적이며 생산과 소비를 불완전하게 연결하는 장치임을 지적한다. 심층의 물질생활과 교환 경제가 차지하는 영역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 시장경제를 전체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어 브로델은 자본주의를 시장경제로부터 구분한다. 일반적인 용법의 경우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의어에 가까운데, 브로델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브로델은 시장경제의 가능한 두 형태를 나눔으로써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나눈다. 첫째, 일상적이고 ‘투명’한 시장 교환의 형태--“눈에는 눈, 손에는 손”이라는 독일 속담처럼--가 있다. 그러나 둘째 형태, 전통적 시장과 구분되는 반反시장’도 존재하는데, 이 시장은 투명하지 않다. 상거래 경로가 장거리로 늘어날수록, 생산자와 수요자의 관계가 끊어지며 양쪽 사정을 다 아는 사람은 중간의 상인만이 남게 된다. 소매상(tradesman)과 구분되는 도매상(merchant)이 탄생하는데, 이 도매상은 불투명한 거래를 통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게임을 왜곡한다. 신용을 조작하고, 양화를 악화로 바뀌주는 등의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들 거상은 근대화의 기능 세분화 과정을 겪지 않으며, 전문화를 거치지 않는다(브로델에 따르면, 수직적 위계에 따른 기능의 분화는 밑바닥에서 나타난다). 자본주의가 나타나는 영역은 둘째 형태의 교환이다. 낮은 곳에 자리하는 교환은 투명하고 경쟁의 힘이 작용하나, 높은 곳에 위치하는 교환은 섬세하며 지배력을 행사하는 교환이다.
브로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순전히 경제적 질서로만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 질서의 한 실재이고, 정치 질서의 한 실재이기도 하며, 문명의 한 실재이기도”(p.77) 하기 때문이다. 브로델은 분화된 사회가 여러 개의 ‘집합’--경제 영역, 정치 영역, 문화 영역, 사회적 위계의 영역 등--으로 나뉘며, 그것들이 서로 관계 맺으며 사회 전체를 구성한다고 본다. 다른 영역과의 호응을 거치며 자본주의는 성장해왔다. 브로델에 따르면, 사회적 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호의적이거나 아니면 국가의 힘이 허약해야,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다. 따라서 브로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밤의 손님’입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을 때 자본주의가 당도한 것이지요.”(p.89)
「세계의 시간」에서 브로델은 ‘세계 전체’--15~18세기 사이 모습을 드러낸 통일성--를 말한다. 인간 생활의 모든 방면과 세계의 모든 사회와 경제와 문명에 대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 전체란 특권을 누리는 집단, 배제된 집단으로 나뉘는 불평등한 것이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 브로델은 ‘세계경제’(économie mondiale)와 ‘경제계’(économie-monde)를 구분한다. 세계경제는 세계를 전부 합쳤을 때의 경제이며, 경제계는 그중 어느 한 부분에 국한되었으되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경제 단위를 이루는 경제권이다. 경제계는 일정한 지리적 공간을 차지하며, 언제나 하나의 핵을 지니며, 중심부(coeur)-중간부(zone intermédiaire)-주변부(zone périphérique)로 이어지는 계층적 경제권으로 구성된다. 유럽의 경제계들은 자본주의적 과정과 팽창을 거치며 점차 세계의 경제계들을 침식하고 지배하여 하나의 세계경제로 통합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드넓은 공간을 이처럼 권위주의적으로 조직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브로델은 ‘도시’와 ‘국민 국가’를 구분한다. 경제계의 핵이 도시에서 점차 국민 국가로 이전되었는데, 국민 국가에서는 ‘국민 경제’(économie nationale)—물질생활의 필요와 혁신을 반영하여 국가가 정치적으로 만들어낸 통일되고 응집된 경제 공간—이 성립한다. 영국이 암스테르담을 꺾고 쟁취한 패권은 도시에서 국민 국가로 경제계의 핵이 재편된 것을 뜻한다.
브로델은 여기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성격을 다음 세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 자본주의는 국제적 자원과 기회를 활용하며, 세계적 차원과 규모에서 존재한다. 둘째, 자본주의는 법률에 의한 것이든 관행에 의한 것이든 독점에 의존한다. 셋째, 자본주의는 경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 물질생활과 시장경제의 남은 부분이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는 아래의 물질생활과 시장경제를 두 겹으로 깔고 그 위 높은 수익이 나는 영역에 서식하는 존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