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호는 자신이 강사로서 ‘인권과 평화’라는 과목을 강의하다가 겪은 경험을 소개한다. ‘KTX 여승무원들의 철도공사 정규직 전환 요구’를 주제로 한 토론에서 그는 학생들로부터 뜻밖의 반응을 마주하게 된다. 2004년 최초 채용 당시 정규직 전환을 보장 받고 들어온 여승무원들이 막상 계약직으로서 불합리한 대우를 이어 받게 된 상황에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한 사안에 대해, 오찬호는 사측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토론 주제로 삼으려 했지만 학생들은 정작 ‘누가 옳은가?’에서부터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 오히려 학생들은 여승무원측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오찬호는 학생들이 정규직에 이르기 위한 충분한 노력을 거치지 않고 얻은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고 소개한다. 오찬호가 볼 때, 워킹푸어, 무산자, 프레카리아트 등 사회경제적인 취약 계층에 현재의 20대가 속하기 쉬운 상황에서, 취약 계층의 처우를 바로잡는 것은 20대의 이해에 부합하는 일이다. 여승무원의 정규직 전환 또한 그러한 바로잡기의 일환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에 지지와 연대를 보내는 것이 청년들 자신에게도 이득일 것이다. 그러나 오찬호가 겪었던 강의실의 학생들은 명백히 자신의 이해와 반대되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이후 여러 차례의 만남 속에서 오찬호는 유사한 사례를 반복하여 접한다.
추론에 부합하지 않는 학생들의 입장에 당혹하며 오찬호는 쓴다. 오늘날 20대는 자기계발의 담론에 포획되어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주장하는 담론과 마주하며 20대는 그 담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자기계발서들은 1990년대부터 베스트셀러가 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사람들은 자기계발이라는 말 없이도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었으나, 정보화능력과 외국어능력이 요구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자기계발’이라는 행동지침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IMF 이후 이것은 전면화 되었다. “핑계대지 말고 스스로를 계발하라”는 것이 자기계발서의 주문이다—자기계발의 논리를 따를 때, 20대는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개인에 대한 편견을 확대재생산하고, 기존의 주어진 길만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 여하로 결과를 설명하고 예측하기에는, 실제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고 오찬호는 인용한다. 자기계발서의 주문을 따라 20대는 행위하지만, 그 결과는 투입과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는다.
이때 나타나는 심리 기제가 바로 세밀한 구별짓기다. 오늘날 20대의 ‘학력위계주의’를 오찬호는 과거의 ‘학력주의’나 ‘학벌주의’와 구분한다. 수능 점수란 20대에게 그 자신의 성실성과 가치를 증명하는 객관적 지표다. 이것에 기반하여 짜여진 수직적인 학교 서열은 20대의 위치를 정해준다. 각 개인의 자질을 판정하는 지표로서 학력위계주의는 기능하며, 이것은 과거의 막연한 학력주의나 패거리 감싸기 또는 과시주의로서의 학벌주의와는 구분된다. 개인의 자질을 증명하는 지표로서 이처럼 학력위계주의가 기능할 때, 20대는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친구를 경멸하고 위에 있는 친구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서강대 ㅠㅠ”와 “서강대!!”의 이중적인 답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오찬호는 개인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사회문제를 ‘자기계발’이나 ‘힐링’과 같은 담론으로 은폐하는 현실을 직시할 것을 주문한다. 사회는 일종의 상대평가를 하고 있으며, 이때 A를 받는 사람들의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개인들이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합적인 논의를 시작한다고 해서 답이 뚜렷하게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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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첫째, 이십대 대학생들에게 자기계발이란 취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 즉, 이들에게 ‘자기계발하기’란 당연히 외국어공부, 학점관리, 자격증 취득, 인턴, 봉사활동, 공모전 참가, 체력관리, 외모 가꾸기(심하면 성형도 불사), 자기소개서 작성 연습, 프리젠테이션 및 스피치 훈련 등을 말한다. (…) 그래서 이십대에게 자기계발이란 ‘성과를 얻기 위한 훈련의 과정’이며, 그렇기에 여기엔 고통스러운 ‘자기희생’이 따른다.
이십대 자기계발하기의 두번째 특징은 그 결과가 무엇도 보장되지 않는데도 다른 대안이 없어 그저 ‘계속’ 해나가고만 있다는 데 있다. (…) 바로 여기에 이십대 자기계발하기의 세번째 특징이 있다. ‘자기계발에 열심이지 않은 게으른 자’와의 비교에서 자신의 현재에 대한 위안과 만족을 구한다는 점.(pp.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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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대학생들은 야구잠바를 ‘패션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어떤 신분증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내가 연구대상으로 만난 대학생의 65%가 학교가 아닌 곳에서 학교 야구잠바를 볼 때 ‘일부러’ 학교 이름을 확인한다고 답했다. 학교 야구잠바가 신분 과시용 소품이라는 방증이다. 실제로 야구잠바를 입는 비율도 이에 따라 차이가 나서, 이름이 알려진 대학일수록 착용비율이 높았다. 낮은 서열의 대학생들이 학교 야구잠바를 입고 다니면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라 신촌으로 놀러오는 그쪽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야구잠바를 벗어서 가방에 넣기 바쁘단다. 심지어 편입생의 경우엔 ‘지가 저거 입고 다닌다고 여기 수능으로 들어온 줄 아나?’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이처럼 학교 야구잠바는 대학서열에 따라 누구는 입고, 누구는 안 입으며, 누구는 못 입는다.(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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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성에 기반한 과거형 학벌은 그 집단에 속함으로써 얻을 긍정적인 효과가 미래에 존재하기에 그 집단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을 전제한다. 단지 동문이라는 이유로 서로 돕는 것은 그 대학을 나오면 웬만하면 취업할 수 있는 현실이 존재하기에 가능했다. (…) 내 옆에 있는 친구가 같은 학교 학생이니까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것은,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자기계발 시대의 의식이 확고한 오늘의 이십대들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 그래서 오늘날에는 동문이란 이름만으로 뭉치던 학벌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퇴색되었다.
그렇다고 학력주의・학벌주의가 사라졌을 리는 만무하다. 학교 이름 하나로 내가 돋보이는 시대는 비록 저물었지만, 나와의 차별화를 위해 남을 ‘밀어내는’ 전략으로는 여전히 유용하다. (…) 과거엔 학벌이란 말에 공동체적 측면이 있었지만, 바로 그 점에서 학력위계주의는 약간 궤를 달리한다. 학벌이 형성돼 대학서열이 만들어지는 형태가 아니라, 그 존재하는 서열을 지킴으로 ‘학력’의 객관적 차이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태도로 그 의미가 변형된 것이다.(pp.165-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