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각 장과 절은 박해천 스스로 ‘비평적 픽션’이라 일컫는 형식--비평이라고 하기에는 허구의 힘이 강하고, 픽션이라고 하기에는 설명적인--에 따라 쓰여졌다. 이 방식의 서술은 정보를 가독성 있게 전달하고 논지를 간결하게 전달하는 방식의 글쓰기는 아니나, 독자로 하여금 묘사되는 각 세대 개개인의 삶을 추체험하고 그들의 맥락에 자신을 대입해볼 수 있게끔 하는 효과를 갖는 듯하다. 그 시기를 살아본 적 없는 이들에게, 또는 자신의 시기에 대한 메타적 관점을 아직 갖지 못한 이들에게, 박해천은 이 비평적 픽션의 형식을 빌어 아파트-큐브의 사회사를 구체적인 것으로서 드러내고자 한다.
책은 일반론으로서의 1장 「아파트, 중산층 가족 로망스의 제2막」, 1955년생 베이비부머의 관점에서의 2장 「저 너머 도미노의 끝」, 1962년생 베이비부머의 관점에서의 3장 「한강의 두 번째 기적」, 이른바 ‘신세대’로 명명되는 1970년대생의 관점에서의 4장 「이름 하여 신세대, 그리하여 청춘의 시뮬라크르」,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파트와는 다른 ‘큐브’ 공간--그러나 이를테면 과거 어떤 시기에는 아파트로 이어지는 주거연속체의 일부로도 다루어질 수 있었을--에 주목한 5장 「지상의 방 한 칸」으로 구성된다.
박해천은 중산층의 형성과 성장을 그 매개물로서 ‘아파트’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요컨대, 부의 사회적인 재분배가 부재한 상황에서 중산층으로의 진입 활로는 주로 아파트를 통한 시세차익에 있었다는 것이다. 상식에 따른다면, 물론 그것이 이제는 박제가 되다시피한 상식일지언정, 박해천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직업을 구하고 근면하게 일을 하며 저축을 하여 차츰 사회계층의 사다리 상층부로 하나씩 올라갈 수 있다는 상식 말이다. 박해천은 ‘산수’와 ‘수학’의 대비를 통해 이 상식을 깨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박민규의 단편소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인용하며 박해천은 다음과 같이 쓴다.
이 두 종족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전자는 빚내서 마련한 아파트 때문에 난리이고, 후자는 손에 움켜쥔 것이라곤 달랑 아파트 한 채뿐이라서 문제라는 것이다. 양자 모두 어느 날 갑자기, 그러나 너무 늦게 ‘자신만의 산수’를 발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 ‘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균등하고 소소한 돈을 가까스로 더하고 빼’는 삶의 반복, 그 속에서 아득함을 느낀 생활인이라면 누구나 ‘수학 정도가 필요한 인생’을 꿈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 두 종족의 문제는 이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것이다.(p.17)
아파트로 인해 허덕이는 하우스푸어와 은퇴를 앞둔 베이비부머라는, 언론에서 심심찮게 묘사되는 위기 앞의 두 종족을 예로 들며 박해천은 산수에 그친 인생--즉, 근면한 저축이면 충분하리라고 믿는 상식에 따른 삶--이 어떻게 궁지에 다다르는가를 보여준다. 산수가 아니라 수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따라서 버블과 아파트의 관계를 눈여겨 본 이들은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정식화했다. 고도성장의 열매가 성과급의 형태로 예비 중산층의 계좌로 흘러들었다가 아파트 분양 대금으로 용도를 변경한 뒤, 부동산 시장의 가파른 상승세와 보조를 맞춰 몸집을 불려 다시 아파트 보유자의 호주머니로 되돌아온다는 것. 그들은 아파트를 매개물로 삼는 두 번의 교환과정을 눈여겨본 뒤 경제 성장률과 도시 팽창 속도를 변수로 삼는 자신만의 수학 공식을 이끌어냈다. (…) 경제개발의 성과가 구체화된 1970년대 이후, 중산층을 꿈꾸던 사회 구성원 중 상당수는 이 버블을 몇 차례 경험했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떻게 대응했느냐에 따라 그들의 ‘집’과 ‘계층’이 결정되었다고 말이다.(pp.19-20)
버블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10년을 주기로 등장한다. 그러나 또한 주목해야 할 하나의 쌍이 있는데, 정치적인 격변과 그것과 맞물리는 세대의 등장이다. 1960년의 4・19, 1972년의 유신, 1980년의 5・18, 그리고 4・19세대, 유신세대, 386세대의 등장 말이다. 물론 통상적인 세대론을 따른다면, 정치적인 격변과 그것을 공통의 경험으로 갖는 코호트로서 특정 세대가 나타난 것이라고 간결히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세대는 당대의 자신들 앞에 주어진 사태를 문제로서 받아들이고 저항한 오이디푸스들이기도 하다. 이 까닭에 박해천은 이들의 세대론을 ‘가족 로망스의 제1막’이라고 명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쌍이 아파트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아파트, 중산층 가족 로망스의 제2막」이라는, 1장의 제목이 보여주듯, 이들 오이디푸스가 다시 아버지가 되는 지점--중산층의 신화를 내면화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 바로 아파트가 있는 것이다. 가족 로망스의 제2막에서, 박해천은 통상의 세대론을 뒤집는 도발적인 의혹을 던진다. 세대론은 오이디푸스에서 아버지가 되버린 이들이 스스로의 ‘진정성’을 옹호하기 위해 내세운 알리바이가 아닐까 하는 의혹이다(p.58).
아파트와 중산층 진입의 ‘수학’에 관한 제각각의 비평적 픽션을 상술하지는 않기로 한다. 정부, 건설사, 중산층 사이의 관계가 외환위기 이후 노무현 정부에 이르러 은행, 건설사, 중산층 사이의 관계로 대치되었고, 2000년대 중반 이후 아파트들의 고급화와 대형화 추세는 아파트를 통한 중산층으로의 진입로를 닫아버렸다는 것이 박해천의 묘사이다. 분양가 상한제가 폐지되고, 부동산 거래 규제가 완화되는 과정을 거치며, 이제는 광장과 아파트를 무대로 삼았던 가족 로망스의 서사가 불가능해진 세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저출산, 저성장, 저금리의 영도(zero degree)다.
또 하나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전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큐브’의 역사다. ‘큐브의 간략한 역사’를 부제로 하는 5장 「지상의 방 한 칸」은 이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큐브란 방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집에 딸린 한 공간으로서만 그것의 성격을 파악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큐브’라는 명명으로서 그것의 독립적인 성격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고시원, 원룸, 혹은 카페, 피씨방으로 이어지는 단칸 방들의 독립적인 성격이 명백한 오늘날에는 더더욱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주거공간, 여가공간, 또 누군가에게는 상업공간일 각각의 방들을 큐브로 이름 붙여 하나의 성격을 공유하는 것으로 파악할 때, 역설적으로 그것의 성격은 집(또는 아파트)과 대비되어 나타난다. 한때는 집 마련에 앞선 과도적 거주지로서 존재했던 큐브는 오늘날의 20-30대에게는 줄곧 기거해야 할 공간이 되어버렸다. 내 집 마련의 사다리가 이제 거의 완전히 끊어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집의 기능은 각각 외주화되어 바깥의 다른 큐브들로 전이된다. 노래방, 피씨방, 카페, 혹은 룸살롱… 남한의 독특한 ‘방 문화’란 결국 집의 부재와 관련지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파트 게임』에는 이 밖에도 흥미롭게 볼 주제가 여럿 있으나, 박해천의 비평적 픽션 전략이 갖는 특성상 여기저기 흩어진 스케치로서 존재한다. 그 성격상 여기서 꼼꼼히 메모하기란 어려우며, 이후 참고할 맥락이 있을 때 들춰보며 인용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워크맨과 이어폰이 일종의 ‘내면의 방’을 만들었다는 진단(p.215)은 디자인 연구자로서 박해천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둔다.
내가 보기에 셋 중 하나였다. 부모의 자산을 물려받아 중산층으로 행세하고 있거나,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내 집을 마련했다가 ‘하우스푸어’로 시름시름 앓고 있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세입자’였던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20여 년 전 노래방에서 신해철이 부른 「나에게 쓰는 편지」의 다음과 같은 한국어 랩을 열심히 따라 불렀을 것이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청춘의 전성기에 이 노래를 애창하던 신세대, 그들이 지금 이 가사를 다시 읽어간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정말 여전히 ‘우리가 찾는 소중함은 항상 변하지 않’는다고,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강철과 벽돌의 차가운 도시 속에’ 너무 일찍 구부정해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면서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많지 않음을 깨닫고 ‘점점 빨리 변해만 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지 않을까? 한때 나에게 많은 자양분을 공급했던 신세대의 2000년대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