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소재, 가벼운 길이감, 단숨에 읽어 낸다 하더라도 생각마저 짤막하게 쳐내지 못하게 만드는 문장의 잔상. 그게 제습기 다이어트가 만들어낸 버석함이라 할 수 있겠다. 감상의 습기를 다 빨아먹어버린다 하더라도 건조하고 바스라지게 만들어둔 이 씁쓸한 감정. 손에 뭍어난 이 아쉬운 가루들을 탈탈 털어버리고 싶어도 주름 틈 사이로 끼어버린 감정. 실제로 저자와 어머니가 나눈 문장 하나로 시작된 이야기였다.
엄마가 주인공 방에 제습기를 틀며 "우리 딸 미라 되면 어떻게 해!"라는 이 농담. 소설은 웃자고 흘린 이야기 한마디가 죽자고 달려드는 세상을 향한 뾰족한 마음이라 말 하고 싶어진다.
연예인보다 마른 그의 몸을 보고 주변에서 너도 나도 예쁘다며 칭찬하지만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미라의 선아를 걱정하진 않는다. 시기와 선망과 함께 푹푹 찔러대는 독설들. 이전의 선아에겐 건강을 우려한 걱정인척 비하를 했고, 현재의 선아에겐 미라 상태의 모습을 사육장 안의 동물들 처럼 눈요깃거리로 하대를 한다. 그들은 어떠한 모습이길 바라길래 비아냥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걸까. 예쁜 몸을 향한 사회의 그릇된 인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에선 타인의 기준을 벗어나 스스로 존중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그리 하는 사람은 몇 없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온 사람이라 한숨쉬며 문장을 따라가게했다. 선아에게 이입이되어 그녀를 바라보는 수십개의 눈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디까지 물고 뜯어댈지 모르는 눈동자들이 식인물고기가 가득한 바닷가에 빠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뚱뚱해본 사람이든 삐쩍 말라본 사람이든 이 세상 살아가면서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요구한적 없는 타인의 시선. 예나 지금이나 변할 일은 없어보이는 과한 오지랖이며 수요없는 공급 같은 것.
가족에게서, 친척에게서, 대학 동기들에게, 나중엔 놀이터의 이름모를 인간에게까지 얻게되는 수치와 모욕의 더블펀치.
지난번엔 곧 터지는게 아닐까 싶어하며 살집있는 외형에 입을 대던 친척은 이제는 미라 상태의 외형을 보더니 수상한 약을 먹은게 아닌지 도통 좋은 쪽으로 봐 줄 생각은 없어보이는 시선과 입에 달려있는 시비.
마른 몸을 갈망하는 시대는 어쩌다 이런 상상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나 싶은데, 이건 사람들이 얽혀 사는 세상에선 절대 없어지지 않을 듯한 아름다움을 향한 등급 나누기로 밖에 보여지지 않았다. 단박에 마른 몸,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심장이 뛰는지도 온 몸에 물기가 스미는지도 관심 없는 사람들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는 틔워낼 숨구멍이 필요했고 그걸 눈앞에 보이던 라일락 향기와 씨앗, 묘목으로 자신을 투영한다.
자신은 미라가 아니라 잠자고 있는 씨앗이자 묘목. 오래된 씨앗은 물기가 없어 바싹 말라 살아있는지 당담 할 수 없지만 그 씨앗은 결국 싹을 틔웠으니 자신도 언젠가는 수분을 당겨와 조금씩 틔워낼 무언가의 과정 중 하나 일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된다. 봄비를 맞고 싱그럽게 잎사귀를 반짝이는 것들 처럼 만물의 모든 이로운 것들만 흡수하며 향기와 온기를 지닐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선아의 진짜 봄은 지금부터라는 식으로 급히 문장을 마무리하며 꽉 닫힌 결말로 후다닥 끝맺었다.
타인이 자신을 향해 불만족한 시선을 내리 깔더라도 자신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살겠다 한들 타인이 한번 꽂아놓은 잣대는 도무지 뽑힐 생각이 없고 도리어 쑤셔되는 통에 우리는 마음이 휩쓸리고 아무도 못 보도록 구석으로 웅크리며 숨게된다. 그게 어쩌면 바싹 말라버린 씨앗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돌멩이인지 씨앗인지는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티가 나지 않을테고 시선을 맞추고 예쁜 말과 다정한 손길이 간다면 마음의 문을 열듯 숨구멍을 벌려 물을 먹고 세상으로 기지개를 켜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나를 씨앗이라 보았고, 타인은 나를 돌멩이로 보겠지.
나는 살이 찌든 바싹 마르든 선아였고, 타인은 나를 돼지 아니면 미라로 보는 것 처럼.
다들 라일락 나무를 끌어안고 비를 흠뻑 맞는 선아처럼 살라고 그리하면 살게 될 거라 말하고 싶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는걸 숨쉬는 동안 매우 뼈져리게 느끼며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 위로가 먹힐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