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부터인가 기념일이 시큰둥해진 것 같다. 내 생일조차 스쳐가는 365일의 하루 뿐으로 취급하는데 성탄절, 사실상 남의 생일이 심드렁해진 건 당연한지 모른다. 어쩌면 거리에서 캐롤이 흘러나오지 않았을 그 무렵부터 연말의 따스한 온기 같은 건 잊어버린거 같기도하고. 그래서 책의 제목을 봤을 때 참 의야했다. 김금희 작가의 전작은, 관념 저 너머에서 '냉소주의'를 품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었거든. 그런데 제목이 무려 '크리스마스 타일'이라니. 김금희의 크리스마스는 어떤 날인가 상상해보기가 쉽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라고 특별해야하는가.
나는 이 책에서 제시한 이 화두에 대한 답에 공감한다. 세월의 때가 묻어 어느 순간부터 매사에 심드렁하고 시큰둥해진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은 상당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남들과 다르게 받아들인다고 내가 잘 못된건 아니니까. 불교신자도 즐거운 크리스마스라지만 누군가에게 그 날은 그져 담담하게 인생의 한조각의 타일을 붙이는 나날일 수도 있단 이야기다. 그 타일이 붙이기 어렵던 쉽던 특별했던 평범했던지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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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이다보니 인물간의 관계가 얽히는게 조금 복잡하게 느껴지긴했다. 단편마다의 주인공들의 사연이 서로 맞물린다기보다 개개의 이야기이기에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고. 그래도 (불편한 편의점이하 무슨 건물그려진 시리즈부터 박상영의 믿음에 대하여도 그렇고) 요즘 연작소설류가 유행인거 같은데 시의성은 적절하지 않았나 싶다. 비슷한 플롯을 읽다보면 작가의 역량이 여실히 비교되는데 김금희의 문체는 몽환적이면서도 흡입력이 있기에 나름 잘 읽힌다 생각하거든. 다만 전작인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에 단편으로 부터 시작한 작품인지라 해당 내용이 복기되듯 계속 반복되는 건 지나친 감이 있긴했다. 맛집 알파고가 여러번 등장하지 않았어도 각개의 이야기만으로도 상당히 재미있고 인과성이 부족하진 않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방송은) 소모적인 일들로 에너지가 바닥난뒤에야 완성되었다. 마치 그렇게 하는 소진 자체가 중요한 사명인 것처럼(p.44)
자기 인식으로는 분명 아닌데 그에 대한 인정과 수용을 강요받는 것, 그 좌절이 얼마나 깊을지는 나 같은 사람이 상상할 정도가 아닐 것이다(p.97)
그런 관계들에 승자는 없고 언제나 패자들만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p.121)
나이들수록 심리적 방어선은 견고해지는 것인지 상처받은 내 모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마냥 숨기고 싶어진다. 여러 이유의 상처들을 그렇게 어둠으로 밀어넣고 애써 외면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야 내가 현재도 덜 상처받을 것 같고 더 완벽한 인간이라 합리화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가족을 외면한 은하도 강아지를 잊으려한 세미도 상처를 묻어야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겠지. 그렇지만 나조차 옴짝 달싹 못하게 구덩이를 파내려간 것 뿐. 각 단편의 주인공들은 결국 스스로 그런 한계를 이겨낸다. 과거의 나에게 너가 한 선택이 그때 최선이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랄까. 연말, 크리스 마스란 그런 것이다.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나날의 이미지가 아니라 내 삶이 타인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 인생의 타일을 붙일 준비를 하는 시기.
사랑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사랑을 찾을 한가을도
현실의 좌절은 여전하지만 호수를 그리며 자존감을 회복하는 옥주도
잊혀진 추억의 옛사랑을 다시 만날 남희도
다소곳이 유난떨지 않고 차분하게 그런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저는 영 나쁜 인간이예요
(중략)
소봄씨가 왜 나빠 그런건 아닐거야 하는.
아니에요 피디님이 어떻게 알아요? 뭘 알아요?
또 시작이네, 알아.
(p.218)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나는 안다. 적어도 첫눈 속에선.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서평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 타일 #창비 #김금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