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살아야 해? 누구를 위해서 그래야 하는 거야? 난 왜 이런걸 물어야 하는 거야? (p.166)
살면서 한번쯤은 스스로에게 해볼 법한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스스로의 저의에 대한 의심까지 들 정도로 괴롭기까지 한 시절이 있었지. 하물며 소위 '망해버린' 세상과 삶에서 살아가야하는 이들이라면 살아가면서 수십번 이런 의구심을 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특정시점 이전의 삶과 그 이후가 달라진 이들이 고통과 번민을 어떻게 극복해가는지에 대한 소설이, 바로 <다이브>다. 한국의 저지대가 대부분 물에 잠긴, 사실상의 종말이라 할 수 있는 2057년의 미래에서도 살아내야한다는 당위성을 설명해준다고나 할까. 이야기는 물에 잠긴 물건을 건져내는 물꾼, 선율의 주변인물들로 부터 일어나지만 직접적으로 선율의 이야기는 아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기억도, 과거의 발전된 문명사회에 대한 그리움도, 심지어 죽고 다시 사는 삶에 대한 특별함도 없는 선율이기에, 어찌보면 일반 독자의 시선이 투영된게 아니었을까 싶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우찬, 가족의 죽음 그 이후
왜 그랬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으니까 답답하고 짜증스럽지.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지 않냐(p.134)
종말에 가까운 세상에서 우찬이 의지한건 누나 유안이었다. 그러니 죽음을 '선택'했다고 나온 유안이 이해가 안가는건 독자로써도 마찬가지여서 우찬의 심정이 너무나 공감이 되더라. 누군가를 탓해도 보고 누나의 유품에 집착도 해보지만 그렇다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는 없다는 것을 우찬도 여실히 알고 있다. 그러니 꼬여버린 매듭이 천천히 풀릴 오년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 더이상 회피가 아닌 용기로 강원도로 떠나는 우찬을 응원해본다.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경,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
누군가를 죽이는 건 나쁜 일이지만 반대로 억지로 살려서도 안 된단 말이야
그 사람이 아니라 널 위해서 한 일 이라면 더더욱(p.36)
모든게 끝났는데도 세상이 더 끔찍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했어(p.182)
수십년간 어린애들을 돌보던 노고산의 어른으로써 경이 속으로 지녔던 삶에 대한 기본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었다 생각한다. 어머니와 수호의 죽음, 특히 수호의 두번째 죽음을 보면서 죽음을 앞둔 인간에게는 삶에 대한 선택권이 보장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겠지. 다만, 이런 생각은 안락사 논란과 같은 파장을 일으킬 수 있기에 조심스럽게 언급되어야하지 않나 싶긴 했다. (개인적으로는 찬성입니다만) 희망없는 미래에서 죽음을 선택하도록 도와주는게 더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길일 수도 있지만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있는 문제니까. 우찬도 그러기에 경 삼촌을 이해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겠지. 쨌든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도덕관념이 필요한 거니까, 그런 의미로 경의 선택도 존중받아야한다 생각한다.
기계인간 수호, 죽고 다시 사는 방법에 대해
내가 좋아서도 아니고, 남을 위해서 행복하게 살 이유가 없잖아 (p.167)
수호의 첫번째 죽음은 병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죽음은 자살이었다. 수호는 두번 다 다시 살고 싶지 않았다. 부모는 자신들의 이기심이라는 기억을 지우고 다시 되살려냈지만, 수호는 그들과 함께 했다면 여전히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호를 수호로써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구심은 또다시 같은 길을 걷게 하지 않았을까. 억지로 끌려와서 삶에 내던져버린(p.168)-그게 수호였다. 그리고 수호는 옆에 있어달라는, 선율이 내민 손을 잡음으로써 자신의 필요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냥 노을을 보면 네 생각이 나서, 앞으로도 줄곧 그럴것 같아서 그래. 너 없이 해가 지면 거기에 빈자리가 남을 것 같아서(p.176)
수호가 망해버린 세상에서 진정한 필요라는 희망을 얻게 된건 소중한 사람을 잃은 기억도, 과거의 발전된 문명사회에 대한 그리움이나 후회도, 심지어 죽고 다시 사는 삶에 대한 특별함도 없는 선율이 그녀의 존재를 원했기 때문이다. 삶이란 무언가를 끊임 없이 추구하는 것. 그게 목적이든 사람이든. 그렇게 살아내야한다는 것. 2057년의 미래도 현재와 같이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